문화재/향토유적

임난수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2호_임씨가묘

기리여원 2022. 3. 17. 11:23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2호_임씨가묘(林氏家廟)

 

지정일 : 2003.02.14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59-1

 

임씨가묘는 고려 말 무신이었던 임난수(林蘭秀, 1342~1407)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임난수는 고려 말 최영(崔瑩, 1316~1388)장군과 함께 1374년 탐라(耽羅)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牧胡-亂)을 평정한 장군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충청남도 공주목 삼기촌(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리)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벼슬을 주며 회유하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의 청을 수차례 거절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 임난수가 심은 나무가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기념물 제8호)’이며, 그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 1371~1448)이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은 ‘나성 독락정(羅城 獨樂亭, 문화재자료 제8호)’이 있다.

 

1407년(태종 7년) 임난수가 죽은 후 1419년(세종 1)에 임난수의 위패를 불천지위(不遷之位)로 모시게 하고 신장(申檣, 1382~1433)에게 지시하여 ‘林氏家廟(임씨가묘)’라 쓴 현판과 토지를 내렸으며, 1430년(세종 12) 현재 숭모각(崇慕閣, 향토문화유산 제35호)이 있는 위치에 임씨가묘를 지었다.

 

현재의 임씨가묘는 독락정에서 북쪽으로 약 70m 떨어진 곳에는 위치한다. 이곳은 1710년(숙종 36)에 지역의 유림들과 임난수의 후손들이 임난수와 임목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기호서사(岐湖書舍)라는 사당을 만들었던 자리이다. 기호서사가 임씨가묘로 바뀐 것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 1820~1898)이 내린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을 피하기 위해 불천지위인 임난수의 위패를 임씨가묘에서 기호서사로 옮기면서 부터이다. 그 후 임씨가묘와 기호서사가 모두 없어졌다가 일제강점기인 1923년 임씨가묘(현재 숭모각) 자리에 ‘林氏家廟遺址(임씨가묘유지)’라는 비석이 세워진 후 1964년 본래 임씨가묘가 있던 자리에는 숭모각이 지어졌으며, 1988년 기호사서가 있던 자리에는 임씨가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임씨가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정면에는 신장이 쓴 ‘林氏家廟(임씨가묘)’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임씨가묘 표지판

 

 

임씨가묘 전경

 

 

관리사무실 겸 부안임씨전서공파대책본부(扶安林氏典書公派對策本部)

 

 

임남군장군像

 

 

구 유명고려임장군신도비(有明高麗林將君神道碑)

 

 

신 유명고려임장군신도비(有明高麗林將君神道碑)

 

 

임씨가묘 전경

 

 

임씨가묘 전경

 

 

임씨가묘 외삼문(外三門)

 

 

 

 

 

임씨가묘

 

임씨가묘는 고려 말 무신이었던 임난수(林蘭秀, 1342~1407)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임씨가묘(林氏家廟) 현판

 

 

임씨가묘

 

임씨가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겹처마에 맞배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임씨가묘 후면

 

 

임씨가묘

 

 

임씨가묘에서 바라본 독락정 전경

 

 

세종특별자치시 문화재자료 제8_ 나성 독락정 (羅城 獨樂亭)

 

독락정은 임난수의 아들 임목이 선인의 절의를 지킨 뜻을 기리기 위하여 지은 정자.

 

임난수장군이 심은 천연기념물로 입법 예고된 '세종 세종리 은행나무'

 

 

숭모각(崇慕閣) 전경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35_ 숭모각(崇慕閣

 

숭모각(崇慕閣)은 고려 말 무신(武臣)이었던 임난수(林蘭秀, 1342~1407)와 부안임씨(扶安林氏)의 시조 임팔급(林八及)을 포함하여 14명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제사(祭祀)를 지내는 사당(祠堂)이다

 

2022.03.06. 세종시 나성동, 임씨가묘

글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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