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대전광역시

송애 김경여가 지은 별당건물,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_송애당

기리여원 2022. 3. 24. 16:02

대전광역시 유형문화재 제8호 _ 송애당 (松崖堂)

 

수  량 : 1동

지정일 : 1989.03.18

소재지 : 대전 대덕구 계족산로17번길 60 (중리동)

시  대 : 조선시대 후기

 

조선 인조(재위 1623∼1649) 때 김경여(1597∼1653)가 지은 별당건물로, 고종 26년(1889)에 다시 지었다. 그의 호를 따서 송애당이라 이름지었다.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구조는 왼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송애당 표지판

 

 

송애당 전경

 

 

송애당 전경

 

 

송애당 출입문

 

 

송애당 

 

조선 효종 때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송애당(松崖堂) 김경여(金慶餘, 1597~1653) 선생이 병자호란(丙子胡亂) 후 벼슬을 버리고 돌아와 1640(인조 18)에 지은 별당(別堂)이다.

 

송애(松崖) 김경여(金慶餘, 1596~1653)

 

김경여(金慶餘, 1596~1653)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경주이고, 호는 송애(松崖)이다. 1596년 회덕현 백달촌의 외가인 송남수의 집에서 태어났다. 16세 때 생원 시에 장원하였고,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20세 때에는 진사 초시에 장원하였다. 1637년 정축강화 이후, 그는 오랑캐에 당한 굴욕에 비분강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노모를 모시고 회덕 고향으로 돌아왔다.

김경여는 백달촌에 송애당을 짓고, 이곳에 기거하면서 곧은 뜻을 지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여 북벌의 뜻을 펴자  다시 출사하여 대사간을 제수 받고, 공신계 김자점의 친정세력을 혁파하는 데 앞장섬으로써 조정의 기강을 바로잡고 북벌운동의 기반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김경여는 품성이 고고하고 기력이 왕성했으며, 풍채와 정신이 빼어나 산악 같은 기상이 있었고, 출처와 의리가 분명하였다. 사후에 그의 위패가 회덕의 정절서원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송애집」이 있다

 

송애당 (松崖堂) 현판

 

 

송애당 

 

‘송애(松崖)’는 눈서리를 맞아도 변치않는 소나무의 곧은 절개와 높이 우뚝 선 절벽의 굳센 기상을 간직하겠다는 뜻으로, 김경여의 높은 기개와 충성심을 잘 표현하고 있다.

 

송애당  우측면

 

송애당의 건물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구조는 왼쪽 2칸은 대청마루이고 오른쪽 1칸은 온돌방으로 꾸몄다

 

송애당 후면

 

 

송애당 좌측면

 

2022.03.20. 대전 대덕구 중리동, 송애당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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