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보 제334호 _ 기사계첩 및 함 (耆社契帖및 函)
수 량 : 화첩 1첩, 내함 1점, 호갑 1점, 외궤 1점
지정일 : 2020.12.22
소재지 : 충청남도 아산시
시 대 : 1719∼1720년(숙종 45∼숙종 46)
‘기사계첩’은 1719년(숙종 45) 59세가 된 숙종이 태조 이성계의 전례를 따라 기로소(耆老所)에 들어 간 것을 기념해 기로소에서 주관한 계첩(契帖)으로, 18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궁중기록화이다.
기로 소는 70세 이상, 정2품 이상 직책을 가진 노년의 문관(文官)들을 우대하던 기관이다. 행사는 1719년에 실시되었으나 계첩은 초상화를 그리는데 오랜 시간이 걸려 1720년(숙종 46)에 완 성되었다. ‘기사계첩’은 기로신들에게 나눠줄 11첩과 기로소에 보관할 1첩을 포함해 총 12첩이 제작 되었다.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사계첩’(국보)를 포함해 5건 정도가 알려져 있다. 국보 ‘기사계첩’은 기로신 중의 한 명인 좌참찬 임방(任埅, 1640∼1724)이 쓴 계첩의 서문 과 경희궁 경현당(景賢堂) 사연(賜宴) 때 숙종이 지은 어제(御製), 대제학 김유(金楺, 1653∼1719)의 발문, 각 의식에 참여한 기로신들의 명단,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 기로신 11명의 명단과 이들의 반신상 초상화, 기로신들이 쓴 축시(祝詩), 계첩을 제작한 실무자 명단으로 구성되어 현재까지 알려 진 ‘기사계첩’과 구성이 유사하다. 그러나 다른 ‘기사계첩’에서는 볼 수 없는 제1-2면의 “만퇴당장 (晩退堂藏)”, 제53-54면의 “전가보장(傳家寶藏)” 글씨는 이 계첩이 1719년 당시 행사에 참여한 기로 신 중의 한 사람인 홍만조(洪萬朝, 1465∼1725)의 소장품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이 내용은 풍산 홍씨 문중에 대대로 보존되어 온 전승 경위를 확실하게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아울러 이 계첩을 보호하고 있는 내함(內函), 호갑(護匣), 외궤(外櫃)가 일괄로 온전하게 남아 있는 사실은 조선시대 궁중회화와 관련된 유물 중 매우 희소한 사례일 뿐만 아니라 유물의 완전성을 돋 보이게 하는 요소이다. 이 내함, 호갑, 외궤는 형식과 제작기법 등으로 보아 계첩과 유사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조선왕실의 봉과(封裹) 방식을 알려주고 세부적인 공예 제작 기술에 대해서 도 귀중한 정보를 알려주므로 함께 지정할 필요가 있다. ‘기사계첩’은 숙종의 기로소 입소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고 있고 후에 고종(高宗)이 기로소에 입소할 때 모범이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아울러 제작시기 및 제작자가 분명하게 밝혀져 있 어 학술적으로 중요하며, 기로신들의 친필(親筆) 시문과 더불어 그림은 높은 완성도와 화격(畵格)을 갖추고 있어 현존 하는 궁중회화를 대표할 만 한 예술성도 갖추었다. 계첩과 동시기에 같이 만들어 진 함(내함, 호갑, 외궤)도 공예사적으로 매우 중요하므로 함께 국보로 함께 지정해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 2020.12.22일부로 보물 제639호에서 국보 제334호 기사계첩 및 함으로 승격되었습니다.
국보 제334호 _ 기사계첩 및 함
숙종이 59세의 나이로 기로소에서 들어갔던 행사를 글과 그림으로 남긴 첩이다. 행사 장면 중 「경현동석연도(景賢堂錫宴圖)」에 숙종이 참여한 잔치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잔치 후기를 남긴 김유(金楺, 1653~1719)의 글을 통해 숙종이 나이든 신하를 예우하고자 베픈 잔치에서 왕과 신하가 함께 즐거워하였음을 알 수 있다.
2022.05.22, 국립고궁박물관_조선의 이상을 걸다, 궁중현판
글 문화재청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문화재 > 국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보 제233-2호_산청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납석사리호 (0) | 2022.06.04 |
---|---|
국보 제200호_금동보살입상 (0) | 2022.06.04 |
국보 제319-3호_동의보감 (0) | 2022.02.24 |
국보 제142호_동국정운 (0) | 2021.12.29 |
국보 제317호_조선태조어진 (0) | 2021.1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