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417호_괴산 송시열 유적, 신도비 및 묘소

기리여원 2022. 8. 8. 08:20

사적 제417호 _ 괴산 송시열 유적 (槐山 宋時烈 遺蹟)

 

면   적 : 24,806㎡

지정일 : 1999.12.29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외 (화양리)

시  대 : 숙종 22년(1696년)

 

조선시대 성리학 중심지 중 한 곳인 우암 송시열 유적이다. 송시열(1607∼1689)은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으로 조선 효종(재위1649∼1659)을 도와 북벌정책을 추진하는 등 자주적인 정치를 펼쳤으며, 주자학의 대가로서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

 

화양서원은 우암 송시열이 잠시 머물렀던 장소에 세워진 서원으로 조선시대 학자들이 많이 모였던 장소이다. 만동묘의 자리는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던 곳이다. 만동묘 주변에는 송시열과 관련된 암서재, 하마비, 읍궁암, 송시열 무덤 및 신도비 외에 암서재 근처의 암벽에 ‘충효절의’·‘비례부동’이란 글을 새긴 곳이 많이 있다.

 

송시열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정신이 깃든 곳일 뿐 아니라 조선 성리학의 중심지로서, 한때는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던 곳이다. 민족 정기회복을 위한 교육 장소로서의 중요성이 인정되는 곳이다

 

 

괴산 송시열 유적 표지판

 

 

괴산 송시열 유적 배치도

 

 

괴산 송시열 유적 전경

 

 

풍천재

 

 

증반청

 

 

존사청(尊祀廳)

 

 

외삼문인 양추문(陽秋門)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 _ 괴산 만동묘정비 (槐山 萬東廟庭碑)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둔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다.

 

영조 23년(1747)에 세웠으며, 이재가 글을 짓고, 유척기가 글씨를 썼다

 

괴산 만동묘정비 

 

 

내삼문인 성공문

 

 

만동묘(萬東廟)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 준 중국 명나라 황제인 신종과 의종의 위패를 모신 사당

 

 

▼화양서원입니다.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우암 선생사후 7년 뒤인 1696년(숙종 22) 권상하, 정호 등이 청천면 도원리 침류정 아래 만경대에 건립하였다. 창건되던 해 바로 사액되고, 1716년에는 어필로 편액을 달았다. 1704년 만동묘 건립후 왕래불편과 서원수호의 이유로 1709년 겨울 만동묘 옆으로 이전하였다.

조선후기 노론사림의 본거지이자 중앙정치의 중심이었으며, 18세기 정치 및 학문의 중심이었다. 후에 '華陽墨牌'의 폐단등으로 1858년(철종 9)에 복주촌이 폐쇄되고, 1871.03.16(고종 8)모든 건물이 헐리고 묘정비는 땅에 묻히게 되었다.

2002~2004년까지 남아있는 초석 위에 송자사, 숭삼문을 복원하였다.

 

화양서원 승삼문

 

 

화양서원 송자사

 

우암 송시열의 위패를 모시는 서원 중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송시열이 병자호란 후 이곳 화양동에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구하며 후학을 양성하였습니다. 그 후 조선 1696년(숙종 22년)에 우암 송시열을 추모하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회양서원을 세웠습니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07호 _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 (槐山 華陽書院 廟庭碑)

 

묘정비는 서원 앞에 세워 서원의 건립취지와 그 서원의 주인·모시는 인물에 대한 문장 등을 기록해 두는 것으로, 이 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을 모신 화양서원의 자리에 놓여 있다.

 

화양서원은 조선 숙종 22년(1696) 송시열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것으로, 창건되던 해에 현판을 하사받아 숙종 42년(1716) 어필로 현판을 달았다. 전국의 사액서원 중에서도 가장 이름있고 위세가 당당한 서원이었으나, 그릇된 세금징수로 심한 민폐를 끼쳐 철종 9년(1858)에 폐쇄되고, 논란 속에 고종 7년(1870) 건물이 헐리었다.

 

비는 네모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운 뒤 지붕돌을 올린 모습이다. 숙종 42년(1716)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윤봉구가 지었다. 서원이 헐리면서 땅속에 매몰되어 있던 것을 광복 후에 다시 찾아 세워 놓았다

 

괴산 화양서원 묘정비

 

 

읍궁암(泣弓岩)

 

화양구곡 중 제3곡으로 둥글고 넓적한 바위에서 우암 송시열이 조선 17대왕 효종임금께서 돌아가신 것을 크게 슬퍼하여 매일 새볔마다 한양을 향하여 엎드려 통곡하였다 해서 읍궁암이라고 부릅니다.

 

읍궁암(泣弓岩)

 

 

암서재(巖棲齋)

 

암서재는 1666(현종 7) 우암이 화양동애 들어와 "화양계당"이라는 초가집을 짓고 살다가 3년 후인 1669년경 주자의 雲谷精舍를 본떠 3칸 정사로 지었다고 한다. 이후 퇴락한 정사를 청주목사 김진옥(金鎭玉)1715(숙종 41) 중건하고, 1747(영조 24)1879(고종 16), 1900(고종 37)에 거듭중수하였다. 지금의 건물은 1970년에 보수한 것인데, 보수 하기 전까지는 암서재 앞에 협문과 낮은 담장이 있었다. 보수를 하면서 담장대신에 철책을 둘렀다.

암서재는 1994.01.07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4호로 지정되었다가 1999.12.29일 사적 제417호에 편입되었다

 

암서재(巖棲齋)

 

암서재의 건물규모는 정면 4, 옆면 2칸으로 정면 4칸 중 좌측 1칸에 우물마루를 깔은 대청을 만들고 이어서 2칸에는 앞에 툇마루가 달린 큰 온돌방을 드렸는데 이 방옆으로 1칸의 반침을 만들어 사용하도록 하였다.

 

괴산 화양구곡 금사담 충효절의(忠孝節義)’ 암각

 

 

▼청전면 청전리에 위치한 송시열 신도비 및 묘소입니다.

 

송시열 재실

 

 

송시열 신도비각

 

 

송시열 신도비

 

 

송우암 신도비 및 묘소 표지판

 

 

 송시열 신도비

 

신도비는 송시열 묘소아래 있으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비각 안에, 정조의 어필로 '유명조선국 좌의정 우암송선생묘(有明朝鮮國 左議政 尤庵 宋先生墓)' 라고 새겨져 있으며 정조 3년(1779)에 세운 것이다. 국난이 있을 때에는 땀을 흘린다고 한다.

 

신도비 좌측 돌계단으로 올라가면 송시열 묘소를 만날 수 있습니다.

 

 

송시열 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1607~1689) 

 

조선 후기의 정통 성리학자로 본관은 은진, 자는 영보, 호는 우암. 주자의 학설을 전적으로 신봉하고 실천하는 것으로 평생의 업을 삼았으며, 17세기 중엽 이후 붕당정치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서인노론의 영수이자 사상적 지주로서 활동했다.

보수적인 서인, 특히 노론의 입장을 대변했으며, 명을 존중하고 청을 경계하는 것이 국가정책의 기조가 되어야 함을 역설했다. 강상윤리를 강조하고 이를 통해서 국가·사회 기강을 철저히 확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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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시열 묘 전경

 

송시열선생 묘는 부인 이씨(李氏)와 합장(合葬) 단분(單墳)이다.

송시열선생 묘 앞에는 묘표 2기, 혼유석 · 상석(床石) · 향로석이 있으며, 묘표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과 문인석(文人石)이 있다. 그러나 장명등은 보이지 않는다.

 

송시열 묘 전경

 

 

송시열 묘의 2개 묘비

 

큰 묘비는 1736년(영조 12) 권상하가 세운 것이며, 작은 묘비는 1804년(순조 4)에 후손이 세운 것이다.

 

송시열 묘 묘비

 

유명조선 좌의정(有明朝鮮 左議政)

문정공 우암송선생묘(文正公 尤庵宋先生墓)

정경부인이씨부좌(貞敬夫人李氏袝左)

 

우암송선생묘표추기(尤庵宋先生墓表追記)

 

 

묘 우측 망주석과 문인석

 

 

묘 좌측 망주석과 문인석

 

 

후면에서 본 송시열 묘

 

2022.07.26. 괴산 송시열 유적

글 문화재청, 전시안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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