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06호_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기리여원 2022. 4. 18. 11:00

사적 제106호 _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求禮 石柱關 七義士墓) 


면   적 : 10,152㎡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전남 구례군 토지면 송정리 171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정유재란 때 전라도지방의 관문이었던 석주관을 끝까지 지키다가 숨진 구례출신 의사(義士) 7명의 무덤이다.

석주관은 경상도지방에서 전라도지방으로 통하는 관문으로서 군사전략상 매우 중요한 곳이었다. 안음의 황석산성·진안 웅치·운봉 팔량치와 함께 영남과 호남 사이의 4대 관문의 하나로, 고려때부터 이곳에 진영이 설치되어 왜군의 침략을 막았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왜군은 호남지방을 목표로 하여 이곳을 집중공격하였다. 그러자 왕득인이 의병을 일으켜 적에게 대항하였으나 결국 숨지고 말았다. 그후 왕득인(王得仁)의 아들과 각 지역에서 모여든 의병·승병들이 힘을 합쳐 처절한 혈전을 전개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의병을 희생시킨 채 끝나고 말았다.

순조 4년(1804)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7명의 의사에게 각각 관직이 내려졌고, 1946년에는 뜻있는 지방 유지들에 의해 칠의각과 영모정이 세워졌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표지판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표지석

 

 

석구관 칠의사 전적지 입간판

 

좌측으로 보면 바로 보입니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전경

 

 

칠의사 묘 및 칠의사 지위단 안내 입간판

 

 

칠의사순절사적비(七義士殉節事蹟碑)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석주관 칠의사 묘는 조선 선조 30년(1597)에 일어난 정유재란 때에 석주관성에서 싸우다 순절한 의병장 일곱 분과 남원성 전투에서 순절한 당시 구례 현감을 모신 무덤이다.

왼쪽부터 현감 이원춘과 칠의사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을 모신 묘이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선비 왕득인은 구례와 남원성이 왜적에게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의병을 모집하여 석주관성으로 가서 진주, 하동 방면에서 몰려오는 왜적과 맞서 싸웠다. 구례의 젊은 선비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 등은 구례로 들어와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는 왜적들에 맞서서 각각 의병을 수백 명씩 모집하고 화엄사에서 승병 153명과 군량미 103석을 지원 받아 왜적과 혈전을 벌였으나 석주관성에서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전란 후에 칠의사 후손들이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혼을 불러 묘를 조성하였고, 순조 4년(1804)에 나라에서 왕득인을 포함한 칠의사의 충절을 기려 관직을 내렸다.

 

칠의사묘에서 60m 올라가면 칠의사 지위단을 만날 수 있습니다.

 

 

칠의사 지위단으로 올라가는 돌계단

 

 

칠의사 지위단

 

칠의사 지위단은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때에 석주관문(石柱關門)을 지키다 숨진 구례 출신 칠의사와 당시 현감과 의병과 승병의 충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만든 단이다.

 

전몰의병 추념비와 전물의병 지위비

 

 

칠의사 지위단

 

이곳 지위단에는 왼쪽부터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한 현감 이원춘과 일곱 분의 의사인 왕득인, 왕의성,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의 위패석과 석상이 있다. 단의 높이는 77cm이다.

 

칠의사 지위단

 

 

칠의사묘에서 바라본 칠의사 전경

 

 

칠의사 외삼문인 장사문(將事問)

 

 

칠의사 제명각(弟明閣)

 

 

칠의사 숭의각(崇義閣)

 

 

칠의사 내삼문인 숙첨문(肅瞻門)

 

 

칠의사(七義祠) 사당

 

구례 현감 이원춘과 칠의사 왕득인, 이정익, 한호성, 양응록, 고정철, 오종, 왕의성의 위패를 모신 사당

 

칠의사(七義祠) 사당

 

칠의사(七義祠) 건물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칠의사(七義祠) 사당

 

2022.04.08, 구례 석주관 칠의사묘

글 문화재청, 안내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