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시도민속문화재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_조경묘출토유의일괄

기리여원 2022. 11. 24. 14:38

서울특별시 민속문화재 제31호 _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조경묘 철릭, 복제품

 

수   량  : 일괄(26건 31점)

지정일 : 2002.08.16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신문로2가 2-1번지 서울역사박물관

시    대 : 조선시대

 

趙儆(1541~1609)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권율과 함께 幸州 山城에서 大捷을 거두어 한양 탈환의 계기를 만든 인물이다. 壬亂 이후로는 漢城府 右尹과 漢城府 判尹을 역임하였고, 선조 37년(1604)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공적을 인정받아 宣武功臣 3等에 책록되고 풍양군(豊壤君)에 봉하여진 바 있다.

 

趙儆의 분묘에서 출토된 本 遺衣들은 墓主의 생몰 연대가 임진왜란 전후인 바 전반적으로 조선 전기와 후기의 과도기적 형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그러한 양상은 액주름포의 주름 형태 및 展衫의 존재, 朝鮮王朝實錄 및 經國大典 상에 대사헌(大司憲)이 착용하는 것으로 나와 있는 해치 흉배가 漢城府 判尹을 지낸 趙儆의 墓에서 출토된 사실 등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전 시기와 동 시기 기타 분묘의 出土 遺衣에서 나타나는 특징과는 약간 다른 모습이다.

 

團領과 답호의 무에 있어서 뒤돌림의 안자락 상단이 겉자락보다 짧으며 그 짧은만큼의 분량을 소매 겨드랑이 밑에 붙인 것도 매우 특이한 점이다. 幅巾은 머리를 포함하여 어깨 위 상체까지를 덮는 기능을 갖춘 것인데 다른 분묘 출토 유물과 달리 매우 크다는 점에서 특이한 예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특히 현재까지 발굴된 분묘 遺衣 중 처음으로 출토된 獬豸胸背는 얇은 옷감에 金絲 등으로 매우 정교한 수를 놓아 완성한 것으로서 보존상태도 매우 좋아 문화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지금까지 발견된 조선 전기(임진왜란 이전)의 유물과 비교할 때 본 유물들은 전반적으로 옷의 질감이 곱고, 바느질이 정교하며, 마름법도 독특하다.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조경묘 철릭, 복제품

 

대화문단(大花紋緞)으로 만든 상의하상(上衣下裳)의 홑철릭이다. 조경묘에서 출토되었다. 상(裳)에는 0.3~0.4cm의 잔주름이 잡혀 있으며 도련의 안단은 문사로 마무리하였다. 걸깃은 칼깃, 안깃은 목판깃이며 소매는 탈부착이 가능한 분리소매로 쌍밀이 단추가 달렸다. 고름은 이중고름으로 고름바대는 직금단(織金檀)을 사용하여 둘레에 일곱땀상침을 하였다.

 

조경묘출토유의일괄 (趙儆墓出土遺衣一括), 조경묘 출토 해치흉배. 복제품

 

대사헌이 상복에 착용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 흉배이다. 앉아있는 해치를 중심으로 구름, 불로초의 파도, 꽃이 장식되어 있다. 연대가 확실하고 유례가 드문 해치흉배로 같이 출토된 유의와 함께 조선 중기 복식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2022.11.23. 서울역사박물관_시민이 만든 박물관

글 문화재청, 전시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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