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299호_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기리여원 2023. 3. 1. 17:58

사적 제299호 _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華城 堤岩里 3·1運動 殉國 遺蹟)

 

면    적 : 607㎡

지정일 : 1982.12.2

소재지 : 경기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2-4번지

 

3·1운동때 일제가 독립운동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탄압한 학살현장이다.

 

3월 10일경에 안종린·안정옥 등이 서울에서 독립선언문과 격문을 입수하고, 3월 25일에 뒷산에 올라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외쳤다. 그후 4월 5일에 발안장날에 주민들에게 나누어주고, 교회 청년들과 시장에 모인 주민들이 만세를 부르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에 일본 경찰이 무차별 사격과 매질을 가해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격분한 군중들은 돌을 던져 경찰부장을 죽였다.

 

4월 15일 일본군은 제암리를 완전히 포위하고 15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한 후, 출입문과 창문을 밖에서 잠그고 일제히 집중사격을 했다. 또 교회당 밖으로 시체를 끌어다 모아 다시 그 위에 짚을 쌓아 불을 질렀다. 이때 무참히 살해된 주민은 어린이를 포함하여 23명이었다. 일본군은 다시 마을을 다니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웃마을 고주리에서는 주민들을 마구 칼로 찔러 죽였다.

 

이 사건은 죄없는 주민들을 학살한 사건으로 일본이 저지른 잔악행위의 상징적인 사건이다. 1982년 제암리마을의 유일한 생존자인 전동례의 증언으로 이 지역을 발굴 조사하였다. 그 결과 23위의 유해와 희생자들의 조끼단추, 동전, 못, 병들이 함께 출토되어 이곳에 표석을 세우고 합동장례식을 거행하였다.

 

불탄 예배당터에는 순국기념탑을 세우고, 국·내외 관계자료를 모아 기념관에 전시해 국민 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표지판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표지석

 

 

3 · 1 정신 교육관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 석호필(石虎弼)/선교사, 수의학자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 1889년 3월 15일 ~ 1970년 4월 12일)는 영국 태생의 캐나다 감리교 선교사이자, 수의학자이며 세균학자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과 독립 후의 대한민국에서 활동하였으며, 제암리 학살사건의 참상을 보도한 그의 활동을 기념하는 뜻에서 “3·1 운동의 제34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가 만든 한국식 이름인 석호필(石好必, 나중에 한자를 石虎弼로 개명)은 오늘날 '스코필드'라는 이름을 쓰는 여러 외국인의 별칭이 되었다. 한국의 독립과 인권에 관련하여 대한민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선교사 중에서도 일원이다.

 

- 위키백과 -

 

제암리 대학살 그림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일본 헌병이 제암리(두렁바위) 기독교 주민 23명을 집단으로 학살한 만행사건의 유적지를 일컫는다.

 

삼일운동순국기념탑(3·1運動殉國紀念塔)

 

 

23인의 상징 조형물

 

 

제암리 3· 1운동순국기념관 및 제암교회

 

 

삼일운동순국기념탑(3·1運動殉國紀念塔)

 

 

화성지역 미전수 독립유공자 훈장전

 

 

우)판결문 _ 1) 홍면등 32인 판결문(1920.04.7, 경성지방법원),

                    2) 홍면 등 22인 판결문(1920.5.31, 경성복심법원)

조)판결문 _ 1) 김현묵 등 27인 관할법원 결정문(1920.03.22, 고등법원) 

                    2) 김현묵 등 27인 판결문(1920.12.9, 경성복심법원) 

 

23위지묘로 가는 계단

 

 

제암리삼·일운동순국23위지묘(堤岩里 3·1運動 殉國二十三位之墓)

 

 

제암리삼·일운동순국23위지묘 좌 · 우측

 

 

제암리삼·일운동순국23위지묘 묘비

 

2023.03.01, 화성 제암리 3·1운동 순국 유적

글 문화재청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