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501호_보령 충청수영성

기리여원 2023. 12. 26. 19:52

보령 충청수영성에 있는 지정문화재

 

1. 사적 제501호_보령 충청수영성

2.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_보령 유격장군청덕비

3.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0호_충청수영 내삼문

4.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_충청수영 장교청

5.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3호_충청수영 진휼청

 

사적 제501호_ 보령 충청수영성 (保寧 忠淸水營城)

 

면    적 : 125,326㎡

지정일 : 2009.08.24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번지 일대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廢營)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軍船) 142척에 수군 수(水軍數)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漕運船)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渴馬津頭)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城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海路) 요해처(要害處)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보령 충청수영성 표지판

 

 

보령 충청수영성 표지판

 

 

보령 충청수영성에서 촬영한 '동백꽃 필 무렵'

 

 

보령 충청수영성 

 

조선시대에 7개 수영을 설치하고 해안 방어의 중심지로 삼았는데, 충청도의 해안방어를 위한 사령부로 충청수군 절도사영(충청수영)이 설치된 곳이 현재 보령시 오천면이다.

충청수군은 조운선 안내, 임진왜란 때는 남해안으로 가서 이순신 장군과 연합하여 왜군 격퇴, 병자호란 땐 강화도로 가 청군에 대항하는 등 중요한 국토 방어 임무를 담당하였다.

전체 성의 길이는 약 1.6km 정도 되며, 일부 구간이 복원되었고, 현재 성 안의 유적은 서문 이외에 장교청(객사 추정), 유격장군청덕비 등이 있다

 

보령 충청수영성 

 

 

서문

 

갑오개혁 이후 폐영되면서 성벽은 허물어졌고, 수영성의 문은 4대문이 있었으나 현재는 아치형의 서문만이 남아있어 충청수영 유적의 상징이 된곳이다

 

서문 후면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 

 

 

충청수영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3호 _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賑恤廳)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장교청과 삼문만이 남아있으며,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음.

 

◦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 부엌 등이 있으며, 충청수영 고지도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음.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賑恤廳)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다. 

 

진휼청에서 바라본 오천항 풍광

 

 

진휼청에서 바라본 오천항 풍광

 

 

진휼청에서 바라본 오천항 풍광

 

 

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풍광

 

 

영보정에서 바라본 오천항 풍광

 

 

영보정에서 바라본 충청수영성

 

 

영보정(永保亭)

 

영보정(永保亭)은 수영성 안에 있던 정자로 1504년 수사 이량(李良)이 처음 짓고 게속 손질하며 고쳐 온 우리나라 절경의 정자였다. 바다 건너편의 황학루 · 한산사와 어우러진, 뛰어난 경치로 조선 시대 많은 시인 묵객들이 찾아와 경치를 즐기며 시문을 많이 남겼는데, 특히 다산 정약용, 백사 이항복은 이곳을 조선 최고의 정자로 묘사하기도 했다. 수영이 폐지되면서 없어져 현재는 터만 남아 있으며, 조선 후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영보정도(永保亭圖)가 전해온다.

 

규남 하백원의 「해유시화첩 」 표지판

 

규남 하백원의 「해유시화첩 」은 충청수영성 일대를 돌아보고 느낀 감상을 그림과 시문으로 만들어 엮은 화첩이다.

 

영보정(永保亭) 우측면

 

 

영보정(永保亭) 좌측면

 

 

사진 한 컷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9호 _ 보령 유격장군청덕비 (保寧遊擊將軍淸德碑)

 

◦ 1598년 4월에 세운 유격장군(遊擊將軍) 계금(季金)의 청덕비로, 유격장군 계금은 중국 명나라 절강성(浙江省) 수군장으로 임진왜란 때 3000명의 수군을 이끌고 이곳 오천(충청 수영)으로 상륙하고 전라도로 이동하여 왜군을 토벌하였음.

 

◦ 비문은 장군의 덕(德)을 칭소하고 왜적을 빨리 무찌르기를 기원하였으며, 장군의 위엄을 빌려 바다에서의 안녕을 기도(祈禱)하자는 내용으로 임진왜란 대 명나라 수군이 상륙한 지점을 알려주고, 당시의 민속을 엿볼 수 있는 비로써, 비문은 안대진(安大進)이 지었음

 

보령 유격장군청덕비 

 

 

충청수영성 부출입구 전경

 

 

충청수영 장교청과  내삼문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0호 _ 충청수영 내삼문 (忠淸水營 內三門)

 

충청수영의 북동측에 있는 이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3칸 중 가운데 한칸을 높여 솟을지붕형태로 건축되었다. 작은 규모의 건축물임에 비해 기둥과 보, 도리 등이 모두 견실한 부재로 건축되어 건물의 품격이 당당하고 육중해 수영성내 중요한 영사(營舍)의 출입문이었던 듯 하다.

 

충청수영 내삼문 우측면

 

 

충청수영성 비석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_ 충청수영 장교청 (忠淸水營 將校廳)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 장교청(객사), 내삼문만 남아있음.

◦ 장교청은 1833(순조 33년)에 만들어져 수영의 군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오른쪽 끝 한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세 칸은 넓은 대청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임

 

충청수영 장교청 

 

충청수영 장교청으로 전해져 오기도 하지만 객사로 추정되기도 한다. 객사는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대궐을 향해 예를 올렸으며, 중앙에서 내려온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던 곳이다.

폐영 이후에는 군청, 학교 건물로 쓰이다가 오천초등학교 자리에 옮겨져 현재 위치에 이전되었다

 

충청수영 장교청 우측면

 

 

충청수영 장교청 우측면 조측면

 

 

충청수영 장교청 풍광

 

2023.12.24, 보령 충청수영성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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