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동학농민혁명의 요람, 고창 무장기포지

기리여원 2024. 6. 10. 15:36

사적 제563호 _ 고창 무장기포지 (高敞 茂長起包址)

 

수량/면적 : 19필지, 7,390㎡

지정일 : 2022.05.02

소재지 : 전라북도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590 외 18필지

시   대 : 조선시대

 

무장기포지는 음력 1894년 3월 20일 동학농민군이 봉기의 이유와 목적 등이 담겨 있는 포고문을 낭독하고 1차 동학농민혁명을 시작한 역사적 현장임. 무장기포로 인해 지역적 민란에서 전국적인 농민혁명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은 유적임

고창 무장 동학농민혁명 기포지 표지판

 

고창 무장기포지

 

동학농민혁명은 한국근대사에서 전국에 걸쳐 사회개혁 의지를 처음으로 드러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고창 무장기포지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권운동이기도 한 동학혁명의 시발점으로 의미가 매우 큰 유적지이다.

고창군에서 대산면으로 가는 국도 22호선 왼쪽 구수마을 일대에 위치하여 있다. 참고로, 무장은 지명이며 기포지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의 참뜻을 기리기 위해 조성된 이곳에는 동학농민혁명의 훈련장으로 사용된 터와 [갑오동학농민군 고창주 의장 추모비]가 자리하고 있다. 또한, 갑오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전봉준 총대장, 김개남 총관령과 손화중 총관령 세 지도자와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인 고창현, 무장현, 홍덕현을 의미하는 늘 푸른 소나무 세 그루를 상징적으로 식재해 놓았다. 기존 기포지에 설치되어 있었던 동학농민혁명 기념탑과 조형물들은 고창동학농민혁명 성지화사업 진행으로 ()신황초등학교에 옮겨 놓았으므로 함께 연계해서 방문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

 

- 대한민국구석구석 _ 

 

고창 무장기포지

 

무장은 지명이며 기포지는 동학농민혁명 포고문을 선포한 집결지를 의미한다.

동학농민혁명군의 진격로 표지판

 

동학 농민군 훈련장

 

동학농민혁명발상지(東學農民革命發祥地)

 

동학농민혁명발상지(東學農民革命發祥地) 표지석

 

동학농민혁명포고문(東學農民革命布告文) 표지석

 

동학농민혁명군진격로 표지석

 

무장기포지 소나무 3그루

 

소나무 3그루는 동학농민혁명을 이끈 총대장 전봉준(중앙), 총관령 김개남(좌), 총관령 손화중(우) 등 3대 지도자를 상징하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군으로 통합되기 이전의 고창현, 무장현, 흥덕현을 의미한다.

무장기포지 소나무 3그루

 

갑오동학농민군고창주의장추모비(甲午東學農民君高昶柱義將追慕碑)

 

무장기포지 당산나무(느티나무)

 

1894년 4월 25일(음력 3월 20일) 무장기포가 일어난 공음면 구수마을은 예부터 당산마을로 불리어진 곳으로 마을의 상징성을 반영한 당산(느티)나무를 이 곳에 식수하였으며,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유구히 계승하고 무장기포지를 지켜주기 바라는 상징적인 의미을 지니고 있다.

동학농민혁명을 상징한 구수마을 교량

 

<전봉준공초(全琫準供草), 복제본> _ 법부편(法部編), 1895년(고종 32), 필사본, 29.7×21.1cm,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서울대 규장각

 

『전봉준공초 』는 1894년 12월 2일 전봉준이 체포된후 1895년 2월 9일부터, 2월 11일, 2월 19일, 3월 7일, 3월10일까지 다섯 차례에 걸친 신문(訊問)기록이다. 동학농민혁명의 전개 상황과 기병 목적, 농민군의 규모, 전봉준의 동학 의도와 동학농민혁명에서의 역할 등을 공초(供草)라는 형식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장 중요한 자료이다. 전봉준은 공초를 통해 농민군의 봉기는 단지 일신의 피해를 제거하기 위함이 아니라 원통하고 한탄스러운 민인의 피해를 제거하고자 한 것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대자적(對自的) 존재로서 봉기했다는 뜻을 드러낸 것이다.

 

* 공초(供草) : 조선시대 형사 사건에서 죄인을 신문한 내용을 초록해 놓은 기록문서

 

2024.05.12.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무장기포지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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