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사적 제145호_고창읍성

기리여원 2024. 9. 17. 10:49

사적 제145호 _ 고창읍성 (高敞邑城)

 

면   적 : 199,972㎡

지정일 : 1965.04.01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126번지

시    대 : 조선시대 초기

 

옛 고창 고을의 읍성으로 모양성(牟陽城)이라고도 하는데, 백제 때 고창지역을 모량부리로 불렀던 것에서 비롯되었다. 나주진관, 입암산성 등과 더불어 호남내륙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단종 원년(1453)에 세워진 것이라고도 하고 숙종 때 완성되었다고도 하나 확실하지 않다.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데 최근 보수공사를 하여 원형에 가깝도록 복구하였다. 성 둘레는 1,684m이며, 동·서·북문과 옹성이 3개소, 장대지 6개소와 해자들로 된 전략적 요충시설이 갖춰져 있다. 성 안에는 동헌·객사를 비롯하여 22동의 관아건물들로 되어 있었으나 대부분 손실되었다.

 

이 성은 조선시대의 읍성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주초와 문짝을 달던 홈이 파인 누문(樓門)을 가지고 있어, 평양에 있는 고구려 시대의 성문, 보은의 삼년산성이나 강화읍성 등에서 볼 수 있는 양식과 비교되어 성곽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또한 여성들의 성벽 밟기 풍습으로 유명한데, 한 해의 재앙과 질병을 쫓고 복을 비는 의식의 하나로 좋은 민속자료가 된다.

고창읍성 (高敞邑城) 표지판

 

고창읍성 (高敞邑城) 전경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에 왜침(倭侵)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牟陽城)이라 고도 하는 이 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 내륙을 방어하는 전초 기지로 만들어진 읍성이다. 1965년 4월 1일 사적 제145호로 지정되었으며 이성의 둘레는 1,684m, 높이 4~6m, 면적은 165,858 ㎡로 동,서,남,북문과 3개소의 옹성(甕城) 6개소의 치성(稚城)을 비롯하여 성밖의 해자(垓字)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東軒), 객사(客舍)등 22동의 조선시대 관아|(官衙)건물이 있었으나 병화(兵火)등으로 소진(消盡)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 있다. 윤달에는 돌을 머리에 이고 성곽을 3회 돌면 무병장수하고 극락승천 한다는 전설이 있어 지금도 부녀자들의 답성(踏城) 풍속이 남아있다.

고창읍성 (高敞邑城) 전경

 

고창읍성 (高敞邑城) 전경

 

고창읍성 (高敞邑城)

 

고창읍성 (高敞邑城)

 

북문인 공북루(拱北樓)

 

이 건물은 낮은 기단위에 전면에는 자연석 주춧돌(礎石)을 사용하고 배면(背面)은 화강석 돌기둥(石柱)위에 둥근기둥을 세워 만든 2층 문루(門樓)이다. 고창읍성에는 정문(正門)인 공북루(拱北樓)(북문)와 등양루(登陽樓)(동문), 진서루(鎭西樓)(서문)등 3개소의 성문(城門)이 있는데 성문앞에는 적으로부터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옹성(甕城)을 둘러쌓고 그 위에 여장(女墻)(여담)을 쌓아 성안에서 밖을 살필 수 있는 현안(縣眼)과 총을 쓸 수 있는 총안(銃眼)(근총안, 원총안)을 만들어 놓있다.

공북루(拱北樓) 좌 · 우측면

 

옥(獄)

 

옥은 죄인을 가두는 곳으로 감옥(監獄) 또는 원옥(圓獄)이라고도 하였다.

조선시대의 옥은 대개 관아(官衙)의 입구에다 짓고 동쪽 칸과 서쪽 칸에 남, 여 옥을 나누어 만들고 높은 담을 둥굴게 둘러 쳤는데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원옥(圓獄)이다.

대원군 척화비

 

이 비는 조선말기에 대원군(大院君)이 펼친 쇄국정책(鎖國政策)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 병인년(1866)에 비문을 만들고 신미년(1871)에 세웠다.

서청(西廳)

 

현재는 고창읍성 관리사무실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향청(鄕廳)

 

조선시대에는 대개의 고을에 향청이라는 관사(官舍)가 있었다. 지방의 수령(守令)을 자문 보좌하던 자치기구로서 조선 초기에는 유향소(留鄕所)라고 하였는데 임진왜란 이후부터 향청이라고 불리워졌다. 향청의 설치목적은 지방의 향리(鄕吏)를 규찰(揆察)하고 향풍(鄕風)을 바르게 하는 등 향촌교화(鄕村交化)를 담당하였다고 한다.

풍화루(豊和樓)

 

이 건물은 고창읍성 연못(蓮池) 옆에 세운 2층 누각(樓閣)이다.

풍화루(豊和樓) 현판

 

이 현판은 금강산인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92세에 쓴 글씨로 풍년과 고을의 평화를 기원하는 뜻이다.

장청(將廳)

 

조선시대에는 왕궁(王宮)과 병영(兵營) 및 진(陳)을 지키는 중앙군인과 지방의 군(郡) · 현(縣)을 지키는 속오군(束伍軍)제도가 있었는데 장청은 속오군의 우두머리인 현감(縣監)과 병방(兵房) · 군교(軍校)들이 군무(軍務)를 보살피던 청사(廳舍)이다.

고창내아(高敞內衙)

 

동헌은 외동헌(外東軒)과 내동헌(內東軒)으로 나뉘는데 외동헌은 사무처로 흔히 이를 동헌이라 불렀으며 내동헌은 수령(守令)이 기거하던 살림집으로 내아라고 불렀다.

고창동헌(高敞東軒)

 

조선시대의 목(牧)과 도호부(都護部) · 군(郡) · 현(縣) 등 각 행정단위에는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守令)이 정무(政務)를 보던 청사(廳舍)를 세웠는데 이를 일반적으로 동헌(東軒)이라 하였다.

고창동헌(高敞東軒)

 

평근당(平近堂) 현판

 

이 현판은 금강산인 석전(石田) 황욱(黃旭, 1898~1993)이 92세에 쓴 글씨로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고을을 편안하게 잘 다스린다는 뜻이다.

군주의 촬영지인 고창읍성

 

고창읍성 내에 있는 맹종죽림지(孟宗竹林地)

 

관상용인 맹종죽은 중국이 원산지다. 1938년 청월(淸月) 유영하(劉映河) 선사(禪師)가 불전의 포교를 위해 이 곳에 보안사(普眼寺)를 짓고 그 운치를 돋우고자 조성한 것이다.

맹종죽림(孟宗竹林)

 

맹종죽림(孟宗竹林)

 

맹종죽림(孟宗竹林)

 

성황사(城隍祠)

 

성황신(城隍神)은 고을의 평화와 풍년을 짘며주는 수호신(守護神)으로 섬겨왔으며 지금도 매년 중양절(重陽節, 음력 9월 9일 모양성제(牟陽城祭)날에 이곳에서 제사를 올린다.

고창읍성 (高敞邑城)

 

고창읍성 (高敞邑城)

 

고창객사

 

조선시대에는 각 고을에 객사라고 하는 관아가 있었다. 중앙의 몸체(正堂)에는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 달 그리고 나라에 경사와 궂은 일이 있을 떄 대궐을 향하여 예를 올렸으며 왼쪽과 오른쪽 방(翼堂)은 조정(朝廷)에서 파견된 관원(官員)들의 숙소로 사용되었다.

작청(作廳)

 

이 건물은 조선시대 지방관아의 작청 건물을 복원한 것이다.

작청은 질청이라고도 하였는데 이방(吏房)과 아전(衙前)들이 소관 업무를 처리하던 청사(廳舍)이다.

관청(官廳)

 

관청은 관주(官廚)라고도 하였는데 지방 관아의 주방(廚房)에 관한 사무를 담당하던 곳이다. 이 곳에서는 수령(守令)과 그 가족등의 식생활을 비롯한 빈객(賓客)의 접대와 각종잔치에 필요한 물품의 조달 및 회계 사무를 관장(官掌)하였다.

고창읍성 (高敞邑城)

 

고창읍성 (高敞邑城)

 

동문인 등양루(登陽樓)

 

등양루(登陽樓)

 

고창읍성 (高敞邑城)

 

고창읍성 (高敞邑城)

 

2024.05.27, 고창읍성

글 문화재청, 전시입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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