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조선왕릉

사적 제206호_화성 융릉과 건릉 (2015.02.08)

기리여원 2017. 7. 15. 13:29

화성시 융.건릉 바로 우리 곁의 역사 


    화성시(안녕동)에 소재한 융.건릉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와 그 아들 정조가 모셔져 있다. 조선 왕릉 중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가까운 곳에 안장된 능은 융릉과 건릉이 유일하다. 사도세자의 능인 융릉은 처음에 서울 휘경동 배봉산에 있었으나 정조 13년(1789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겼다. 융릉과 건릉의 각각은 부부합장묘인데 융릉에는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와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모셨고, 건릉에는 정조와 효의왕후가 누워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가슴 아픈 사연은 능과 주변시설의 형태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대개의 왕릉은 정자각과 능침이 일직선의 축을 이루지만 유릉의 경우 일직선을 이루지 않고 있다. 지극한 효심의 정조는 뒤주에 갇혀 돌아가신 아버지의 답답함을 풀어드리고자 능앞을 가리지 않고 트인 형태로 만들었다.

  정조는 매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참배하기 위해 화성을 방문했다. 이 행차는 오늘날 '정조의 화성 능 행차"라는 이름으로 정조대왕의 아버지 사도의 능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석,나란히


  조선의 왕릉은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이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며 환경도 잘 유지, 관리되고 있다.  융.건릉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고즈넉하게 뻗어 있는 소나무 숲길이 손님을 맞이한다. 은은한 솔향과 함께 평온한 기분을 느낄 수 있다. 평소 어린이와 가족단위 방문객이 맞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길을 따라 오른편으로 가면 융릉의 있고, 왼편에는 건릉이 자리하고 있다. 융릉과 건릉은  길이 3.3km의 둘레길로 이어져 있다. 경치를 구경하며 여유롭게 산책이 가능하다.

  다른 왕릉과 마찬가지로 융릉에도 정자각 오른쪽에 비각(碑閣)이 있다. 왕릉의 비각에는 한개의 비석만이 있지만 융릉은 사도세자와 정조의 비석이 함께 있다. 사후에라도 왕으로 추존(追尊)될 아버지 사도세자를 위해서 아들 정조가 비석을 세울 장소에 하나 더 만들었기 때문이다. 1899년 고종은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했고, 그 비극적인 생을 위로하는 비석을 하나 더 모셨다.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효심을 찾아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장소이기도 하다.


                                                                                                                                    2015. 10.10      동아일보 여행, 나를 찾아서



융릉 정자각



건릉 정자각






수령140년 된 향나무






사적 제206호 _ 화성 융릉과 건릉 (華城 隆陵과 健陵)                


지정일 : 1970.05.26

시   대 ; 조선시대


융릉은 사도세자와 그의 부인 혜경궁 홍씨의 무덤이다. 정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장헌세자라 하였고, 1899년에 의황제로 봉해졌다. 이때 혜경궁 홍씨도 의황후로 봉해졌다.

융릉은 원래 양주의 배봉산에 있던 영우원을 수원의 화산으로 옮겨 현륭원이라 하였다. 합장릉인 융릉은 병풍석을 세우고 모란과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전기의 8각형과 숙종, 영조대에 등장한 4각형 석등의 양식을 합한 새로운 양식으로 건릉과 예릉의 기준이 되고있다. 무덤의 석인도 사실적이고 예전에 가슴까지 숙여진 머리가 들려 있어 시원한 분위기를 내며, 문인석에서는 머리에 금관을 쓴 예가 나타나고 있어 19세기 이후의 무덤 양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조는 현륭원을 마련할 때 온갖 정성을 기울여 창의적으로 만들었다.

건릉은 조선 22대 정조와 그의 부인인 효의왕후 김씨의 무덤이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조선 후기의 황금문화를 이룩하였다.

건릉은 현융원의 동쪽 언덕에 있었으나 효의왕후가 죽자 풍수지리상 좋지 않다는 이유로 서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하였다. 무덤은 한 언덕에 2개의 방을 갖추었으며 난간만 두르고 있고, 그 외의 모든 것은 융릉의 예를 따랐다. 혼이 앉는 자리인 혼유석이 하나만 있으며, 융릉과 같이 8각형과 4각형을 조화시켜 석등을 세웠다. 문무석은 사실적이며 안정감이 있는 빼어난 조각으로 19세기 무덤의 석물제도의 새로운 표본을 제시하였다.


※(융릉·건릉 → 화성 융릉과 건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 (2011.07.28 고시)


세계유산 조산왕릉 _ 화성 융릉과 건릉



























융릉으로 먼저 답사하러 갑니다.












융릉


융릉(隆陵)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의 능

 

장조(莊祖, 1735~1762, 사도세자)는 제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生父)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가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1899년(광무3)에 장조로 추존되었다.

헌경왕후(獻敬王后, 1735~1815, 혜경궁 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영조20)세자빈에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궁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1899년(광무3)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왕후로 추존되었다.


융릉


* 융릉 연혁

- 1789년(전조 13) 양주 배봉산(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릉원이라 고쳐 부름.

- 1816년(순조 16) 헌경왕후(혜경궁 홍씨)합장

- 1899년(광무 3) 장조으로 추존, 융릉으로 높임, 장조의황제로 추존

 

* 융릉 제향일

- 매년 4월 둘째 일요일(양력)














수라간



융릉 정자각


융릉의 참도는 매우 넓으며 조선 후기 양식의 전형을 보여준다.

융릉은 참도 뿐만 아니라 효종 이후 사라졌던 병풍석, 봉분의 인석 위 꽃봉오리 석물 등 그 어느 능보다도 화려하고 정성을 들인 능이다.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릉



추존 장조와 헌경왕후릉



사도장헌세자와 혜경홍 홍씨 비각



                                                                    헌경왕후 비



헌경왕후 비문



사도장헌세자 현릉원비



사도장헌세자 현릉원비 비문


















융릉 답사를 마치고 건릉으로 갑니다.














건릉


건릉(健陵)

조선 22대 정조와 효의왕후의 능

 

정조(正祖, 1752~1800, 재위 1776~1800)는 추존 장조(사도세자)의 룰째아들로 1776년 제21대 영조가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즉위 직후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천명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노력을 다했다. 문무를 겸비했던 정조는 규장각을 두어 학문 연구에 힘쓰고, 장용영을 설치하고 수원 화성을 쌓는 등 조선의 중흥을 이끌었다. 또한 정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여 붕당정치의 폐해를 막기 위해 힘썼다.

효의황후(孝懿王后, 1753~1821)는 좌참찬 청원부원군 김시묵의 딸로 1762년(영조 38)세손빈에 책봉되었고,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지성으로 모셔서 영조의 총애를 받았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건릉


* 건릉 연혁

- 1800년(정조24) 정조 안장, 현릉원 동쪽 두 번째 언덕에 조성(초장)

- 1821년(순조21) 현릉원 서쪽 산줄기 지금의 자리로 천장, 효의왕후와 합장

 

* 건릉 제향일

- 매년 5월 둘째 일용일(양력)














수라간






 

건릉 정자각



건릉 정자각


정자각(丁字閣): 능 제향을 올리는 정(丁)자 모양으로 지은 집. 제향을 올릴때 왕의 신주를 이 곳에 모신다.











정조와 효의왕후 김씨의 합장릉












건릉비문내용
























재실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지정일 : 2009.09.16


개비자나무는 보통 키가 3m 이내로 낮게 자라는데, 이 나무는 키가 4m에 이르고 줄기 둘레도 80cm에 이르는 등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조사되어 융릉 재실 조영 당시에 심었을것으로 추정된다.

보존상태도 우수하여 우리나라 개비자나무를 대표하는 가치가 있으며, 융릉 재실과 관련된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크다.

* 융릉(隆陵):사도세자와 혜경궁홍씨를 모신 능(사적제206호).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표지판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



천연기념물 제504호 _ 화성 융릉 개비자나무 (華城 隆陵 개비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