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조선왕릉

사적 제193호_구리 동구릉1. (2015.01.18), 수릉, 현릉, 건원릉, 목릉

기리여원 2017. 7. 26. 06:54

구리 동구릉에 있는 문화재

 

보물 제1741호_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보물 제1742호 _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보물 제1743호 _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보물 제1803호 _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사적 제193호 _ 구리 동구릉


사적 제193호 _ 구리 동구릉

 

 동구릉(東九陵)

 

동구릉은 "동쪽에 아홉 개의 왕릉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를 비롯한 역대 왕과 왕후를 모신 9개의 능이 있다.

 

- 건원릉 : 제1대 태조(재위 1392-1398)의 능

- 현   릉 : 제5대 문종(재위 1450-1452)과 현덕왕후의 능

- 목   릉 : 제14대 선조(재위 1567-1608)와 의인왕후 및 인목왕후(계비)의 능

- 휘   릉 : 장열왕후(제16대 인조의 계비)의 능

- 숭   릉 : 제18대 현종(재위 1659-1674)과 명성왕후의 능

- 혜   릉 : 단의왕후(제20대 경종의 비)의 능

- 원   릉 : 제21대 영조(재위 1724-1776)와 정순왕후(계비)의 능

- 수   릉 : 문조(추존)의 신정왕후(추존)의 능

- 경   릉 : 제24대 헌종(재위 1834-1849)과 효현왕후 및 효정왕후 및 효정왕후(계비)의 능

 

보물 제1741호 _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수   량 : 1동

지정일 : 2011.12.26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10

시   대 ; 조선시대


건원릉은 태조의 능으로서 경기도 구리에 있는 동구릉 경내에 위치하고 있다.건원릉은 고려의 왕릉인 현릉(공민왕 능)의 제도를 표본으로 태종 8년(1408)에 조성되었다. 정자각은 고려시대에도 건립되었으며 조선왕조도 건국 초기부터 왕릉에 정자각을 조성하였으므로 건원릉의 정자각도 능침의 조성과 함께 건립되었다. 정자각은 능제에 따라 능침 남쪽에 낮게 자리하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건원릉을 조성하면서 함께 지어졌다. 이후 선조 19년(1586)에 중수했다고 전하며 선조 25년(1592)임진왜란 때에는 왜군이 방화하려 했으나 불이 붙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숙종은 건원릉을 수리하려 했지만 왜란의 신기한 사연을 듣고 손대지 않았다고 숙종실록에 전한다. 그러나 1764년(영조40)건물이 크게 퇴락하여 중수도감을 설치하고 건물을 수리했다. 1784년(정조8)에도 소규모 수리가 있었으며 고종 16년(1879)에는 건원릉 외에 목릉, 휘릉, 숭릉, 혜릉, 원릉, 수릉, 경릉의 정자각을 고치면서 수리했다. 일성록에 의하면 이 때의 수리는 주로 비각과 정자각의 계단석이 기울어져서 수리했다고 하였다. 기록에 남은 건원릉에 대한 마지막 수리는 광무 3년(1899)능의 석물을 고친 기사가 있지만 이 때는 정자각은 손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에는 ‘산릉의 침전(寢殿:정자각)은 능실(陵室)남쪽에 있는데, 북쪽에 자리하여 남쪽을 향하게 하고 모두 3칸으로써, 동쪽과 서쪽에 계단이 있고, 신좌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한다’라고 기술하고 있으며, 정자각의 모습을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건원릉 정자각은 이와 같은 모습이다. 정자각은 홍살문 북쪽 능상 남쪽에 있다. 장방형의 기단 위에 정전 정면3칸 측면 2칸에 배위청 정면1칸 측면 2칸이 전체적으로 丁자형을 이루며 서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4단 이상 쌓은 단정한 모습이다. 배위청 동측의 향로(香路)계단석 우석은 테두리만 조금 남고 마모가 심하여 문양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본래는 다른 정자각과 마찬가지로 구름무늬가 새겨져 있었다고 추정된다. 정전은 1출목 2익공이고 살미 끝은 18세기의 조각모습을 지니고 있다. 정전은 전체적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정자각의 규모나 외관을 잘 간직하고 있다. 또한 공포부분 등 세부는 18세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어서 영조 40년(1764)도감을 설치하고 실시한 중수 때의 시대 특징을 충실히 지니고 있다고 판단된다.

건원릉 정자각은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국조오례의』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초창기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조선 1대 태조의 능인 건원릉의 정자각이라는 상징적 의미 뿐 만 아니라 조선의 능침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으로서 역사적,예술적,학술적 가치가 큰 건물이다.

 

보물 제1803호 _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

 

수  량 ; 1기

지정일 : 2013.07.16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10

시   대 : 조선시대


구리 태조 건원릉 신도비(九里太祖健元陵神道碑)’는 1409년(태종 9)에 세운 것이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년)의 건국 과정을 비롯하여 생애와 업적 등을 영원히 기리고자 일대기를 짓고 돌에 새겨 세운 비이다. 이 신도비는 이수(螭首), 비신과 귀부(龜趺)가 양호하게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왕의 신도비는 물론 여타 신도비의 전형으로 평가된다.

태조 건원릉 신도비는 당대의 신망있는 문신이자 대학자였던 권근(權近, 1352~1409년)이 비문을 짓고, 명문장가였던 변계량(卞季良, 1369~1430년)이 비음기(碑陰記)를 지었으며, 명신 서예가인 정구(鄭矩, 1350~1418년)가 전액(篆額)을 쓰고, 조선 초기 명필인 성석린(成石璘, 1338~1423년)이 비문글씨를 썼다.

비록 비좌 부분이 새롭게 만들어졌지만 고려시대 석비 조형을 탈피하여 조선시대 들어와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전통을 받아 들여 세운 비로, 조선시대 석비의 기준작이 되는 한편 서예사를 비롯한 역사·문화사 연구자료가 될 수 있는 매우 귀중한 문화재이다.

 

보물 제1743호 _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수   량 : 1동

지정일 : 2011.12.26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6

시   대 : 조선시대


목릉은 조선 14대 선조와 원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으로 현재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다. 원래 목릉의 능역은 선조 33년(1600)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裕陵)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선조가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릉이 건원릉의 서편에 조영되었는데, 능에 물이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에 따라 인조 8년(1630)현 위치로 천릉하고 유릉과 목릉의 능호를 합하여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인조 10년(1632)에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영하게 되어 현재와 같이 세 능을 이루게 되었다.

광해군 즉위년(1608)에 건원릉 서쪽에 조성되었다가 지세가 좋지 않다는 풍수가의 견해와 터에 물이 차는 등의 이유로 인조 8년(1630)건원릉 동쪽으로 천장되었다. 천장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물 수리가 있었지만 건물 자체에 손을 댄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고종 16년(1879)에 계단석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기단은 장방형으로 정전이 배위청보다 한 단 높다. 정전은 정면 3칸,측면 2칸에 다포식으로 공포를 짰다. 현존하는 정자각 중에 다포식 공포를 갖춘 건물은 이 건물이 유일하다. 공포는 내외 1출목이며 외부 살미는 약간의 곡선을 갖추면서 아래로 처져 있고 소첨차와 대첨차는 높이에 비해 길이가 길어 안정된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17세기 초에 다시 지어진 문묘 대성전의 공포 짜임과 유사한 분위기를 갖추고 있어서 이 시기에 다포식 공포의 좋은 사례로 평가된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배위청은 정면 1칸,측면 2칸이고 기둥위에 바로 보머리가 얹혀지며 기둥 사이에 행공첨차를 끼워 화반 역할을 하도록 꾸몄다. 정전 측면은 고주 둘을 세워 벽체를 구성했는데 이런 방식은 정자각에서는 보기 드물다. 나머지 창호나 화방벽을 한 벽체 등은 대체로 조선시대 일반적인 정자각의 제도를 잘 따르고 있다.

목릉 정자각은 초창과 이건한 모습에 약간의 차이가 있으나 현재의 모습은 인조 8년(1630)에 이건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조선왕릉 정자각 가운데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로 살미의 형태나 구조가 장식화 되기 이전의 전기적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으로 가치가 크다.

 

보물 제1742호 _ 구리 동구릉 숭릉 정자각

 

 *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의 정자각 중 유일한 팔작지붕이다.

 

수   량 : 1동

지정일 : 2011.12.26

소재지 : 경기 구리시 인창동 66-25

시   대 : 조선시대


숭릉은 조선 18대 현종(顯宗)과 비 명성왕후의 능으로 동구릉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숭릉은 하나의 곡장 안에 왕과 왕비의 능을 나란히 조성한 쌍릉의 형식이다. 숙종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였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숙종 10년(1684)에 현종의 비 명성왕후의 능을 왕릉 옆에 나란히 조성하였다. 능 아래에는 정자각과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능역 남쪽이 저습하여 진입로 등이 쉽게 물난리를 겪는 등 진입부분이 지형적으로 취약하지만 능역은 비교적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의 거리가 비교적 멀고 정자각이 경사지 위에 있어서 멀리서 보기에도 우뚝한 모습이 돋보인다.

숭릉 정자각은 숙종 즉위년(1674)에 현종의 능을 조성하면서 건립되었다. 건립 이후 정자각은 몇차례 수리를 거쳤으며, 순조 28년(1828)에는 정자각 월대를 개축했다는 기록이 순조실록에 보이고, 마지막 수리 기록은 고종 16년(1879)에 계단석을 수리한 기록이다.

정자각의 지붕을 팔작으로 조성한 것은 인조 장릉의 정자각부터였다. 장릉 정자각은 정전 3칸,배위청 2칸으로 5칸의 팔작지붕 형태였다. 이를 전례로 동구릉에 조성된 효종의 정자각도 팔작지붕으로 조성되었고, 현종 14년(1673)에 효종의 영릉(寧陵)을 여주로 천릉하면서 정자각의 규모를 8칸으로 확대하여 정전 5칸, 배위청 3칸으로 조성하고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이후 『현종산릉도감의궤』에는 숙종 즉위년(1674)에 숭릉을 동구릉에 조성하면서 영릉의 정자각을 표본으로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효종영릉천릉도감의궤』에는 영릉 천릉 시 정자각의 제도를 광릉 정자각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8칸 정자각은 광릉 이후에 기록상으로 선릉, 정릉, 효릉, 강릉,장릉 등에서 꾸준히 나타나고 있으며 영릉, 숭릉, 명릉, 익릉, 의릉의 정자각이 8칸으로 지어졌다. 이와 같이 정자각이 8칸으로 규모가 확대되는 것은 영악전이 폐지되며 그 기능을 정자각이 수용하는 것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존하는 8칸 정자각은 숭릉을 비롯하여 익릉, 휘릉, 의릉의 정자각이 있다. 그러나 숭릉을 제외한 나머지 정자각은 맞배지붕의 형태이며, 숭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42기(남한 40,북한 2)중 유일한 팔작지붕 정자각으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8칸 정자각이다. 공포는 정전은 일출목 이익공, 배위청은 이익공의 구조이며 규모가 8칸으로 확대되었지만 전체적으로 균형감 있게 건축된 외관을 보여주고 있다.

숭릉 정자각은 영릉(寧陵)의 제도를 따라서 정전 5칸, 배위청 3칸의 전체 8칸으로 지어진 건물이며 유일하게 팔작지붕인 정자각이다. 또한 이러한 규모나 지붕 형식은 창건된 1674년의 형태를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음을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이 건물은 17세기 정자각의 다양한 유형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사례라는 점에서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크다.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히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조선왕릉의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이 42기이고, 원이 14기이며, 묘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을 말하며 원(園)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私親)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눙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사적 제193호 _ 구리 동구릉

 

면   적 : 1,969,675㎡

지정일 : 1970.05.26

소재지 : 경기 구리시 동구릉로 197 (인창동)

시   대 : 조선시대


조선을 세운 태조의 무덤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뒤 조선시대를 통하여 가족무덤을 이루고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이란 도성의 동쪽에 있는 9개의 무덤이란 의미로, 무덤이 생길 때마다 동오릉·동칠릉이라 불렀는데 철종 6년(1855)에 수릉이 옮겨진 이후 동구릉으로 굳어졌다.

태조가 죽은 뒤 태종은 서울 가까운 곳에 후손들이 묻힐 좋은 땅을 찾다가 하륜(河崙)에 의해 이곳을 무덤지역로 정하였다고 한다. 400여 년에 걸쳐 왕릉이 자리잡았음은 동구릉의 지세가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 임을 나타내주는 것이라 하겠다.

동구릉에는 1대 태조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무덤인 현릉, 14대 선조과 의인왕후·계비 인목왕후의 무덤인 목릉,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의 무덤인 휘릉, 18대 현종과 명성왕후의 무덤인 숭릉,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의 무덤인 혜릉,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 추존 문조대왕과 신정왕후의 무덤인 수릉, 24대 헌종과 효현왕후·계비 효정왕후의 무덤인 경릉 등 9개의 무덤이 있다.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을 기본으로 삼아서 만들었으며, 조선왕조 최초의 왕릉으로서 이후 왕릉의 본보기가 되었다.

동구릉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왕릉이 변화하는 과정을 살필 수 있다. 무덤을 만들 때 각 무덤에 따른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재실을 지었다고 하나 현재 각 무덤에 재실은 없고, 9개 무덤을 하나의 경계지역으로 하여 구릉 남쪽에 재실이 있다.

전체적인 모습은 중앙 북쪽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 3개, 서쪽에 5개의 무덤을 거느리고 있는 모습이다. 조선의 왕릉 중 한 지역내에 왕릉군을 이루고 있는 곳은 서오릉과 서삼릉이 있으나, 동구릉에 가장 많은 무덤이 있다.


 

 

 

 

 

 

 

 

 

 

 

 

 

 

 

 

 

 

 

 

 

 

 

 

 

 

 

 

 

 

 

 

 

 

 

 

 

 

 

 

 

 

 

 

 

 

 

 

 

 

 

 

 

 

 

 

 

 

 

 

 

 

 

 

 

 

여기서부터는 수릉입니다.

 

 

 

 

 

 

 

홍살문에서 본 수릉 정자각

 

 

 

 

 

 

 

 

 

 

 

 

 

 

 

 

 

 

 

 

 

 

 

 

 

 

 

 

 

                                                            수릉 (綏陵) _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문조文祖(익종翼宗 1809~1830)는 제23대 순조의 아들로 효명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시작하여 인재를 널리 등용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펴기 위해 노력했으나 22세에 요절하였다.

1834년(순조34)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 때 다기 문조로 추존되었다.

신정황후紳貞皇后(1808~1890)는 풍은부원군 조만영의 딸로 1819(순조19) 효명세자(문조)와 가례를 올리고 세자빈에 책봉되었다. 1834년 부군인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존되자 왕대비가 되었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흥선대군의 차남 고종을 왕위에 올린 후 수렴청정하였다. 83세까지 천수를 누리며 조선 후기 정국을 주도했다.

 

 

                                                                수릉 (綏陵) _ 추존 문조와 신정황후의 능

 

 

 

여기서부터는 현릉입니다.

 

 

 

 

 

 

 

 

 

 

 

 

 

 

 

 

 

 

 

 

 

 

 

 

 

현릉 _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문종文宗(1414~1452, 재위1450~1452)은 제4대 세종의 맏아들로 8세에 세자가 되어 29년 동안 세자 자리에 머물면서 학문을 익히고 정치 실무를 배웠다. 1450년 세종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으나 건강 악화로 재위 2년여 만에 만인 39세에 승하했다.

현덕왕후賢德王后(1418~1441)는 화산부원군 권전의 딸로 1431년(세종13) 세자(문종)의 후궁이 되었다. 1437년 세자빈이 순빈 봉씨가 폐위되자 세자빈에 올랐으며 1441년 단종을 낳고 산후병으로 세상을 떴다. 사후 1450년 문종이 즉위하면서 왕비로 추봉되었다.

 

현릉 _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현릉 _ 조선 5대 문종과 현덕왕후의 능

 

 

문종대왕 현릉 비각


 

 

 

 

 

 

 

 

 

 

 

 

 

 

 

 

 

이제 현릉답사를 마치고 건원릉으로 갑니다.

 

 

 

 

 

 

 

 

 

 

 

 

 

 

 

 

여기서부터는 건원릉입니다.

 

 

 

 

 

 

 

 

 

 

 

 

 

 

 

 

보물 제1741호 _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보물 제1741호 _ 구리 동구릉 건원릉 정자각

 

* 건원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조성제도에서 정자각의 표준이 된 건물이다.

 

태종 8년(1408)에 건원릉과 같이 건립되었고, 그 후 몇 차례의 중수가 있었지만 '국조오례의(國朝

五禮儀)"길례 단묘도설과 비교해 볼 때 건립 시의 기본적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보물 제1803호 _  태조 건원릉 신도비

 

* 건원릉 신도비에는 조선을 개국한 이성계의 조선 건국 과정과 생애, 업적 등이 담겨있다.

 

 

 

 

 

 

 

 

 

 

 

 

 

건원릉 (健元陵) _ 조선 제1대 태조의 능

 

고려의 뛰어난 무장이었던 태조太調(1335~1408, 재위 1392~1398)이성계는 1392년 개경(지금의 개성)에서 왕위에 올라 새 왕조를 열었다.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나라의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정하는 등 기틀을 마련하였다. 명나라와의 친선을 도모하기 위해 사대정책을 썼고 농본주의를 통해 농업을 장려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권력 다툼이 화를 불러일으키자 정치의 뜻을 버리고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다. 말년에는 불도에 정진하다 1408년(태종8) 5월24일 창덕궁에서 74세에 나이로 승하했다.



*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건원릉 봉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건원릉 (健元陵) _ 조선 제1대 태조의 능

 

 * 건원릉의 봉분에는 억새풀이 자라고 있다.


말년에 고향을 그리워하며 그곳에 묻히기 원했던 태조를 위해 태종이 태조의 고향 함경도 영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 건원릉 봉에 심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여기서부터는 목릉입니다.

 

 * 목릉으로 진입하는 길 옆으로는 서어나무 군락지가 있다.

 

목릉으로 진입하는 길목에는 짙은 수림의 서어나무 군락지가 자리하고 있어 정취를 돋운다

 

 

 

 

 

 

 

 

 

 

 

 

 

 

 

 

 

의인왕후릉

 

 

 

 

 

수라청

 

 

 

 

 

보물 제1743호 _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보물 제1743호 _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보물 제1743호 _ 구리 동구릉 목릉 정자각

 

* 목릉 정자각은 조선왕릉 정자각 중 유일한 다포형식의 건물이다

 

 

 

 

 

 

 

 

 

 

 

 

 

 

 

조선 제14대 선조의

 

목릉(穆陵) _조선 제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의 능

 

선조宣祖(1552~1608, 재위1567~1608)는 제11대 중종의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1567년(명종22)명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왕위에 올랐다. 선조는 이황, 이이 등 인재를 등용하여 선정에 힘쓰는 한편 여러 전적을 간행해 유학을 장려했다. 그러나 심각한 당쟁으로 정치는 불안정했고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기도 했다.

의인왕후懿仁王后 (1556~1632)는 반성부원군 박응순의 딸로 1569년(선조2)왕비에 책봉되고 가례를 올렸으나 자녀를 두지 못했다.

인목왕후仁穆王后(1584~1632)는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딸로 1602년 왕비로 책봉되어 1606년에 선조의 유일한 적통인 영창대군을 낳았으나 광해군의 손에 아들을 잃었다. 인목왕후는 서궁에 유폐되었다가 인조반정으로 복위되어 대왕대비에 올랐다.

 

 

 

 

 

 

 

 

 

 

 

 

 

 

 

 

 * 목릉의 신도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영되었다

자각에서 선조릉과 의인왕후릉, 인목왕후릉으로 각각 뻗으며 꺾이고, 층이 생기기도 했다.

 

 

 

 

 * 목릉의 신도는 지형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조영되었다

자각에서 선조릉과 의인왕후릉, 인목왕후릉으로 각각 뻗으며 꺾이고, 층이 생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