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조선왕릉

사적 제194호_헌릉과 인릉 , 보물 제1804호_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기리여원 2017. 1. 25. 06:31

헌릉 · 인릉(獻陵 · 仁陵)

 

헌릉은 조선왕조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능이다.

태종은 재위 18년간(1400~1418)여러 제도를 개혁하고 학문장려, 호폐법 실시 등 많은 업적을 남겨 조선왕조의 기초를 튼튼히 하였다.

인릉은 제23대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 김씨를 모신 능이다

 

인릉

 

인릉(仁陵)

 

조선 23대 순조와 순원왕후의 능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는 제22대 정조의 둘째 아들,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증조할아버지 영조의 제2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였다. 1803년(순조 3) 친정을 시작해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편찬, 국왕친위부대 강화, 하급친위관료 육성 등 국정개혁과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순원왕후(純元王后, 1787~1857)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로 1802년(순조 2)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와의 사이에 효명세자와 공주 셋을 두었으며, 15857년(철종 8)8월 창덕궁 양심각에서 승하했다.

 

* 인릉 연혁

 

- 1856년(철종 7)인조의 장을(파주소재) 왼쪽 산줄기에 있던 능을 지금의자리로 천장

- 1857년(철종 8) 순원왕후 합장

 

* 인릉 제향일

- 매년 10월 20일(양력)

 

헌릉

 

헌릉(獻陵)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태종(太宗, 1367~1422, 재위 1400~1418)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 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조선을 건국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왕위를 놓고 태조의 왕자 사이에서 벌어진 '1,2차 왕자의 난'을 치르고 1400년 왕위에 올랐다. 왕위에 오른 후 사병을 혁파하고, 육조직게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했으며, 1405년(태종 5)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고 신문고와 의금부를 설치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418년(태종 18)3남 충녕대군(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1382년(고려 우왕8)이방원(태종)과 혼인했고 1392년(태조 1)정년옹주에 책봉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비(靜妃)로 진봉되었다. 양녕, 효령, 충녕(세종), 성녕의 4대군과 4공주를 두었다.

 

* 헌릉 연혁

 

- 1420년(세종 2) 원경왕후 안장, 헌릉 조성

- 1422년(세종 4) 태종 안장, 쌍릉으로 조성

 

* 헌릉 제향일

 

- 태종 : 매년 6월8일(양력)

- 원경왕후 : 매년 8월27일(양력)

 

 

헌릉.인릉 주차장

 

 

 

 

                 

사적 제194호 _ 서울 헌릉과 인릉 (서울 獻陵과 仁陵)

 

멵   적 : 1,057,646㎡

지정일 : 1940.05.2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헌인릉길 34 (내곡동, 헌인능관리사무)

시   대 : 조선 시대

 

헌릉은 조선 3대 태종(재위 1400∼1418)과 원경왕후 민씨(1365∼1420)의 무덤이다.

태조 이성계의 다섯번째 아들로서 아버지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웠다. 1·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고 정종 2년(1400)에 왕위를 물려받았다. 토지와 조세제도를 정비하고 군사제도도 개혁하였으며,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억압하는 등 국정전반에 대한 개혁을 단행하여, 조선 초기의 민생안정을 이룩하였다. 태종의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이며, 태종이 왕위에 오르기까지 큰 힘이 되었다.

헌릉은 쌍릉으로 무덤 아랫부분이 병풍석으로 둘러있으며, 무덤의 형식은 태조의 건원릉을 따랐다. 각 무덤에 12칸의 난간석을 둘러서 서로 연결하였고 무덤 앞에는 양석과 호석·문석인·마석을 배치하였다. 무덤 앞의 석물은 고려시대의 현릉·정릉, 조선시대의 후릉과 같이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각각 하나씩을 더 갖추었다. 언덕 아래에는 정자각이 있고 비각을 세웠다.

인릉은 23대 순조(재위 1800∼1834)와 순원왕후 김씨(1789∼1857)의 무덤이다. 순조는 11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인 정순왕후 김씨에게 정치를 돌보게 됨으로써 외척에 의한 정치가 극에 달하였고, 사회가 혼란했다.

인릉은 무덤에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고, 12칸의 난간석을 둘렀으며 양석과 마석·상석·망주석을 세웠다. 언덕 아래에는 2개의 비석을 세웠다.

 

 

 

 

인릉(조선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

왕후 김씨를 모신 합장릉)

 

 

 

인릉 표지판

 

 

인릉(조선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

왕후 김씨를 모신 합장릉)

 

 

 

 

 

 

 

 

 

인릉 정자각

 

 

 

인릉 정자각

 

 

 

인릉 정자각에서~

 

 

 

 

 

 

 

 

 

 

 

 

정자각에서 바라 본 어로 및 홍살문 전경

 

      

 

 

 

 

 

 

 

인릉비각

 

 

 

 인릉 구비문

 

 순조대왕인능 순원왕후부좌

 

 

인릉 신비문

 

 

순조숙황제인릉 순원숙황후 보좌

 

 

 

 

 

 

 

 

 

 

 

 

 

인릉(제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릉, 합장릉)

 

 

인릉(제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릉, 합장릉)

 

 

인릉(제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릉, 합장릉)

 

인릉(제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릉, 합장릉)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1790~1834)는 11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영종의 게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하였다. 수렴청정이 끝난 후 친정(親政)하였으나 왕비의 집안인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가 시작되어 과거제도의 문란과 매관매직의 성행, 홍경래의 난 등 민란이 일어나 정치적.사회적으로 혼란하였다. 원래 묘호는 순종(純宗)이었으나 철종대에 순조로 바꾸었고, 1899년(광무 3) 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순원숙황후(純元肅皇后 1789~1857)는 순조가 왕위에 오른 후 왕비로 책봉되었으며, 헌종과 철종이 왕위에 오른 후 수렴청정을 하여 조선의 왕비 중 유일하게 2번 수렴청정을 하였다. 1899년(광무 3)에 황후로 추존되었다.

 

인릉(제23대 순조숙황제와 순원숙황후 김씨의 릉, 합장릉)

 

 

 

인릉 답사를 마치고 헌릉으로갑니다.

 

 

여기서부터는 헌릉입니다.

 

홍살문에서 바라 본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 표지판

 

 

 

홍살문에서 바라 본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홍살문에서 바라 본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홍살문에서 바라 본 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능)

 

 

 

헌릉 정자각, 우측은 비각

 

 

이 곳은 수복방과 수라간은 없습니다.

 

 

현릉 정자각에서~

 

 

 

 

 

 

 

 

 

정자각에서 바라 본 홍살문

 

 

 

 

 

 

 

 

헌릉(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민씨의 릉)


헌릉(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능)

 

 태종(太宗 1367~1422)은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큰 공을 세웠으나, 세자책봉문제로 왕자의 난을 일으켜 반대세력들을 제거 하였다. 왕위에 오른 후 중앙과 지방제도를 정비하고 사병을 페지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육조직계제를 실시하고 외척 세력을 견제하는 등 조선 초기의 왕권강화에 힘썼다. 원경왕후(元敬王后, 1365~1420)는 태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힘이 되어 주었으나,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부터 태종의 외척세력 견제로 화를 입어 태종과의 불화가 끝이지 않았다. 1420년(세종2)에 태종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헌릉에 먼저 모셔졌고 2년 뒤에 태종과 쌍릉으로 모셔졌다.

 

헌릉(조선 제3대 태종과 원경왕후의 민씨의 릉) 

 

헌릉 비각

 

 

 

 

 

보물 제1804호 _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서울 太宗 獻陵 神道碑) 

 

수   량 : 1구

지정일 : 2013.07.1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1-3080

시   대 : 조선시대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서울 太宗獻陵神道碑)’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로 조선 왕조의 왕권을 다졌던 태종 이방원(太宗 李芳遠, 재세 1367~1422, 재위 1400~1418)의 생애와 업적 등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 일대기를 새겨 넣은 비석이다. 1424년(세종 6)에 세운 것으로 조선 초기의 서예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자료로써 손색이 없는 금석문이다.

비문은 변계량(卞季良, 재세 1369~1430)이 짓고, 글씨는 성개(成槪, 재세 ?~1440)가 썼으며,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머리글자)은 권홍(權弘, 재세 1360~1446)이 썼다.

임진왜란으로 인해 귀부(龜趺)는 손상되었지만 이수(螭V首)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 새롭게 명나라의 석비 전통을 받아들이는 비석의 이수양식을 연구하는데 기준작이 된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표지판

 

 

 

 

 

 

 

 

 

 

 

 

 

 

 

좌측은 처음건립된(1424) 구비, 우측은 숙종 21년(1695) 중견된 신비

 

 

 

 

 

 

 

 

 

헌릉.인릉 재실

 

문이 닫혀져 있어 외부에서만 볼 수 밖에 없습니다.  

2017.01.08.에 김포 장릉에 갔을 때도 재실 보수공사로 보질 못했는데....아쉽습니다.

 

 

 

 

 

 

외부에서 본 헌릉.인릉재실

 

 

 

 

 

 

 

 

 

 

 

 

 

2017.01.22, 서초구 내곡동, 헌릉과 인릉

글 문화재청, 전시안내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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