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북도 50

진천 송씨(鎭川 宋氏) 시조(始祖) 송인(宋仁) 묘

충청북도 기념물 제91호 _ 진천 송인 묘소 (鎭川 宋仁 墓所) 수량/면적 : 일곽(690㎡) 지정일 : 1994.01.07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두촌리 산 391-3 소유자(소유단체) : 진천송씨대종회 고려 인종 때 공신으로 진천 송씨의 시조인 송인의 묘소이다. 송인은 고려 인종 4년(1126) 이자겸의 난 때 인종을 호위하다가 척준경의 반란군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난이 끝난 후 평장사(平章事)라는 고려시대 최고의 벼슬자리에까지 이르렀다. 송인은 ‘진천백’이라는 벼슬을 지냈는데, 당시 ‘백’이라 하면 그 고을의 행정, 사법은 물론 경제에 관한 모든 일들을 다스리는 높은 벼슬이었다. 송인은 진천백으로 있을 때 고을 사람들이 보다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밤낮으로 노력하였으며 모든 일을 공정히 ..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_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80호 _ 진천 남지 묘소 및 신도비 (鎭川 南智 墓所 및 神道碑)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1988.09.30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평산리 산18-1번지 소유자(소유단체) : 의령남씨충간공파종회 조선 초기의 문신 충간공 남지의 묘소이다. 그는 개국 공신 남재(南在)의 손자로 17세에 벼슬길에 나가 세종 31년(1449) 우의정을 거쳐 문종 1년(1451) 좌의정에 올랐다. 계유정난 때 병으로 화를 피하고 성종 20년(1489) 손자 남기의 상소로 시호를 받았다. 봉분은 사다리꼴 모양이고 봉분 앞에는 상석과 향로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 문인석이 1쌍 서 있다. 묘 아래에는 8대손 남구만이 글을 지은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94호_진천 이정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94호 _ 진천 이정 묘소 (鎭川 李挺 墓所) 수량/면적 : 일곽(480㎡) 지정일 : 1994.06.24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사양6길 1-18 (사양리) 소유자(소유단체) : 청주이씨문중진천군종친회 고려 후기의 문신인 이정(1297∼1361) 부부의 묘소이다. 고려 충숙왕 12년(1325) 음서로 팔관보판관이 되고 다음해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으며, 1358년 벼슬이 형부상서에 이르렀다. 공민왕의 각별한 총애를 입어 내불당 짓는 일을 감독하였으며, 공민왕이 친히 쓴 글씨 ‘탄상하교문(嘆賞下敎文)’을 받았다. 그의 친족은 모두 높은 관직에 올랐고,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이후 그의 집정기간에는 유력한 지지세력으로서 조선 건국에 크게 도움을 주었다. 묘는..

충청북도 기념물 제124호_진천 석장리 유적

충청북도 기념물 제124호 _ 진천 석장리 유적 (鎭川 石帳里 遺蹟) 수량/면적 : 일원(26,684㎡) 지정일 : 2002.04.26 소재지 : 충청북도 진천군 덕산읍 석장리 381 시 대 : 삼국시대 진천 석장리 유적은 미호천 상류에 형성된 충적대지와 노령화된 낮은 구릉지대로 이루어진 지역에 위치하고 있는데, 해발 105m 내외의 야산에서 북쪽으로 뻗어내린 완만한 구릉의 서쪽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은 국립청주박물관이 실시한 진천군 문화유적 지표조사에서 찾아진 유적으로 1994년부터 1997년까지 4차년에 걸쳐 발굴조사되었는데, 발굴지역에서 모두 36기의 철 생산 또는 철제품 제작과 관련된 노적(爐蹟)이 확인되었다. 유적은 낮은 구릉의 작은 골짜기를 이루는 경사지를 이용하여 한정된 공간에 다..

충청북도 기념물 제134호_진천 김덕숭 효자각

충청북도 기념물 제134호 _ 진천 김덕숭 효자각 (鎭川 金德崇 孝子閣)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2005.03.11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1224-5 소유자(소유단체) : 강릉김씨중곤공파문중 조선 세종대의 효자 김덕숭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1633년(인조 11)에 세운 정려문이다. 규모는 정면 1칸,측면 1칸의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전(紅箭)으로 막고, 처마 밑 중앙에는 서하(墅河) 임헌회(任憲晦)가 짓고 전우(田愚)가 쓴 정려기를 달았다. 건물 내부에는 현판 외에 효자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덕숭은 한산군수(漢山郡守)의 직(職)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부모봉양에 온 힘을 기울였으며, 아버지가 잉어가 먹고 싶다고 하여 여계소(女溪沼)에 앉아서 어름을 녹이니 잉어가 튀어..

충청북도 기념물 제104호_진천 이집 묘갈

충청북도 기념물 제104호 _ 진천 이집 묘갈 (鎭川 李楫 墓碣) 수 량 : 1기 지정일 : 1995.06.30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 137-1번지 조선 중기 효자 이집의 묘 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이다. 이집의 본관은 고성으로 어릴 때부터 효심이 지극하여 부모가 병으로 누워있으면 옷을 벗지 않고 웃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대변을 맛보아 병을 짐작하고 밤에는 밖에 나가 하늘에 기도하였다고 한다. 보호각 내 비는 네모 반듯한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정교한 조각솜씨가 돋보이는 머릿돌을 올린 형태이다. 머릿돌에는 두 마리 용의 모습이 마치 살아서 꿈틀거리듯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비는 1727년(영조 3)에 세웠다 진천 이집 묘갈 표지판 이 안내간판에서 왼쪽으로 100m 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78호_진천 홍우경 · 정인옹주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78호 _ 진천 홍우경・정인옹주 묘소 (鎭川 洪友敬・貞仁翁主 墓所)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1988.09.30 소재지 : 충북 진천군 광혜원면 실원리 산50-2번지 소유자(소유단체) : 남양홍씨남양군파당원위(위우경)종친회 선조의 사위인 정간공 홍우경(洪友敬, 1590∼1625)과 그의 부인 정인옹주의 묘소이다. 선조 36년(1603)에 선조의 넷째 딸 정인옹주와 혼인하여 당원위(唐原尉)에 봉해지고, 봉헌대부에 올랐다. 그러나 광해군 10년(1618)에 폐모론이 일어나자 음식먹기를 중단하고 잠도 자지 않던 중 이이첨, 한찬남의 음모를 상소하였다가 오히려 역적으로 몰려 관작을 박탈당하고 유배되었다. 그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관작을 회복하였으며, 1625년 36세로 사망한 뒤 수록..

충청북도 기념물 제95호_진천 이거이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95호 _ 진천 이거이 묘소 (鎭川 李居易 墓所) 수량/면적 : 일곽(300㎡) 지정일 : 1994.06.24 소재지 : 충북 진천군 진천읍 상계길 110 (상계리) 소유자(소유단체) : 청주이씨문도공거이파종중 조선 초기의 문신인 청허당(淸虛堂) 이거이(1348∼1412)의 묘소이다. 이정(李挺)의 넷째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조선 왕조 건국에 공이 있어 태조 2년(1393)에 우산기상시에 임명되었고, 그 뒤에도 여러 관직을 역임하였다. 정종 2년(1400)에는 사병제도 혁파에 반대하다가 계림부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제1차 왕자의 난 직후에 공신이 되었고, 이후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까지 올랐다. 묘의 형태는 직사각형으로 흙과 돌을 섞어서 쌓았으며 원래의 모습이 잘 남아 있다...

송강 정철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진천 정송강사

충청북도 기념물 제9호 _ 진천 정송강사 (鎭川 鄭松江祠) 수량/면적 : 일곽 지정일 : 1976.12.20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송강로 523 (봉죽리) 조선 전기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1593)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사당이다. 선생은 정치인보다 시인으로서 천부적인 재질을 나타냈는데, 관찰사로 재직하면서 『관동별곡』, 『훈민가』, 『성산별곡』 등을 지었고 낙향한 뒤에는 『사미인곡』, 『속미인곡』 등 많은 가사와 단가를 남겼다. 이 사당은 경기도 고양에 있던 정철의 묘를, 현종 6년(1665) 송시열 선생이 정한 현 자리로 옮기면서 지은 건물이다. 지금 있는 것은 규모가 너무 작아 197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_진천 정철 묘소

충청북도 기념물 제106호 _ 진천 정철 묘소 (鎭川 鄭澈 墓所) 수량/면적 : 1곽 지정일 : 1996.01.05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 산14-1번지 소유자(소유단체) : 영일정씨문청공파종중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시인인 송강 정철(1536∼1593)의 묘소이다. 명종 17년(1562)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였고, 여러 관직을 두루 거쳐 선조 17년(1584)에 대사헌이 되었다.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서인의 대표로 동인을 추방하였으며, 다음해 좌의정에 올랐다. 1591년 광해군의 책봉을 건의하여 파직하였으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기·충청·전라의 3도체찰사가 되었고, 1593년 중국 명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정철은 정치가로서 큰 일을 많이 하였지만, 붕당 싸움에 말려 반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