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원

사적 제154호_경주 옥산서원(2015.02.20)

기리여원 2018. 4. 21. 09:28


사적 제154호 _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지정일 : 1967.03.08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서원길 216-27 (옥산리)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되었다.

이곳은 선조 5(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문루,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서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 한국무화의 뿌리를 찾아서<2> 이언적 선생 모신 옥산서원


  경주의 옥산서원(玉山書院)을 찾아가는 길가엔 봄꽃이 흐드러졌다. 만물이 소생하는 절기임이 확연하다. 옥산서원은 조선시대 전기의 큰 선비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선생을 모셔놓은 서원이다, 회재는 외가인 경주부 영좌천(지금의 양동민속마을)에서 태어났지만 말년엔 관직을 그만두고 양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경주시 안강읍 옥산에 터를 잡고 성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회재의 사후에 후학과 유림들이 모여 회재를 본받고자 하여 만든 것이 바로 옥산서원이다. 옥산서원은 회재가 은거하던 독락당(獨樂堂) 가까이에 있다. 1573년(선조8년)에 창건되었고, 1574년 '옥산(玉山)'이라는 사액(賜額)을 받았다. 임진왜란 때도 화를 면했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아 형태가 잘 보존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회재의 성리학을 크게 발전시킨 한국 성리학의 큰 산맥 중의 한 분이다. 회재라는 호도 성리학의 체계를 완성한 중국 송나라 주자의 호 '회암(晦庵)'에서 따왔다. 주자의 학문을 깊이 연마하겠다는 의지가 담겼다.  성리학의 뿌리는 공자의 사상과 닿아있다. 공자의 사상이 당나라 때 전성기를 누렸던 불교의 사상을 포용하여 새로운 체계로 재탄생한 것이 성리학이다.


  회재는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씨 부인 슬하에서 자랐다. 외가살이를 하면서 외삼촌 우재 손중돈(愚齋 孫仲暾, 1464-1529)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게 된다. 아버지의 부재는 회재를 또래들보다 조숫하게 한 요인이 됐다. 사춘기도 빨리 찾아와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10세 때 삶과 죽음이라는 철학적 명제에 빠져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서  어디로 가는 가?' 등의 철학적 물음에 눈 뚠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은 '산다는 것'에 대한 철학적 명제에 천작하게 했고, 회재는 그 해답을 외삼촌을 통해 배운 성리학에서 찾게 된다. 12살이 되면서 회재는 외삼촌인 관직생활을 하던 양산. 김해.상주 등지로 따라다니면서 성리학을 배웠고 성리학에 몰입했다. 회재의 불우한 성장 환경이 불타오르는 진리에의 불길을 더욱 치열하게 만들었다.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문과 별시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그의 재능은 정치적 경륜보다 학문에서 더욱 빛났다. 망기당 조한보(忘機堂 曺漢輔)와의 네 차례에 걸친 '무극태극논문변'(無劇太極論辯)은 조선조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수많은 철학 논변의 효시가 되었다. 회재는 41세 때 김안로(金安老)의 재임용에 반대하다가 관직을 박탈당하자 바로 고향마을 인근에 있는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은거하면서 자기완성의 수양철학에 매진하였다. 유학의 근간은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이다. 수기가 완성되면 치인에 나아가지만 치인에 문제가 생기면 바로 수기를 보완한다. 7년여에 걸친 수기의 과정을 거친 회재는 47세 때 조정의 부름을 받고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종1품의 의정부 좌찬성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을사사화로 인해 낙향했다가 다시 2년 뒤 발생한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평안도의 강계로 유배됐다. 유배는 회재에게 학문을 마무리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였다. 회재는 6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속대학혹문(續大學或問)>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구인록(求仁錄)> <진수팔규(進修八規)>등 유학사에 길이 남을 저작들을 완성한다. 유배지 강계에서 63년의 일생을 마감했다. 회재의 일생은 진리를 얻기 위한 철저한 수양의 삶이었고, 그 내용은 그 저술에 녹아있다. 회재는 이황(李滉)과 함께 한국 수양철학의 거대한 산맥으로 훗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마을에서 옥산서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냇물을 건너야 한다. 냇물을 건너는 것은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하는 것이기도 한다. 냇물을 건너면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온다. '역락(亦樂)'이란 논어에서 나오는 글귀다. 공자는 이 세상에 가장 기쁜 일은 부귀영화를 얻는 것도,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아니라 학문을 통해 군자가 되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기쁜 길을 여럿이 모여 함께 가면 더욱 즐겁다. 그 즐거움 마음이 역락이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역락문에 들어서면 무변루(無邊樓)라는 누각이 나온다. 현판 옆에 있는 옥산서원기에는 "처음엔 납청루(納淸樓)라고 불렀다.'고 적혀 있다. '납청'이란 맑은 기운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사람의 기운은 우주의 기운과 하나로 통해 있다. 우주의 기운으로 존재하는 사람은 그 자체로 그냥 우주다. 그것은 뚜껑이 없는 물통이 바닷물 속에 들어있는 것과 같다. 물통 속의 물과 물통 밖의 물이 하나이기 때문에 물통은 바다 전체와 하나와 마찬가지인 이치다. 그러나 물통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뚜껑을 닫아 버리면 바닷물과 물통 속의 물은 격리된다. 사람도 그렇다. 사람에게 욕심이 있으면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것으로부터 자기를 차단한다. 뚜껑이 닫힌 물통 속의 물이 돼버린다. 닫힌 물은 썩어버리게 마련인 것처럼 우주의 기운과 단절된 사람은 기운이 고갈되어 병이 든다. 납청을 하여 우주의 맑은 기운을 들여오면 나는 다시 우주와 하나가 돼 한계가 없어진다. 그렇게 되는 것이 무변이다. 그러니 납청루와 무변루는 하나로 통한다.


  무변루를 통과하면 좌우에 학생들의 기숙사가 나온다. 왼쪽에 있는 기숙사에는 암수재(闇修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오른쪽에 있는 기숙사에는 민구재(敏求齋)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암수'란 남몰래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이고 '민구"란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특히 민구란 논어의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옛것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그것을 구한 사람이다(子曰我非生而之者 好古 敏以求之者也)" 라고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는 자기가 원래부터 성인이 아니라 열심히 옛 진리를 구하여 얻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밝혔다. 공자가 이 말을 한 뜻은 사람들에게 모두 자기 같은 사람이 되도록 독려하기 위해서였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해 학문에 매진하라는 의미다.


  기숙사 건너편 강당엔 '옥산서원'이란 현판이 걸려있는데 한 눈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서체임을 알 수 있다. 사대부의 강직한 기개가 돋보이는 힘차고 정갈한 해서체가 봄볕에 눈부시다. 그 안쪽에 구인당(求仁堂)이란 현판이 또 걸려 있는데, '구인'이란 회재 선생이 추구했던 세계의 요체이다.


  "인(仁)을 구한 사람은 하늘같은 사람이고 우주 같은 사람이다. 인을 구한 사람은 가난해도 행복하고 몸이 죽어도 행복하다. 부처님은 가진 재산도 없었고 벼슬도 없었지만 불행하지 않았다. 인을 얻으면 부처님처럼 되는 것이다." '학문하는 목적을 성인이 되기 위한데 두었던 회재선생의 가르침이 들리는 듯하다.


  구인당 뒤에는 체인문(體仁門)이 있고, 체인문 안에는 체인묘(體仁廟)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과 전시청이 있다. '체인"이란 인을 몸으로 체득하여 인의 마음이 몸 밖으로 배어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옥산서원의 부속 건축물들은 정문부터강당.사당등이 일직선을 이루고,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각가의 영역을 형성하는 기하학적인 구성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주변의 자연 경관과 어울려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옥산서원은 곳곳에 하나하나 음미하는 사이 문득 깨닫게된다. 옥산서원이 바로 군자가 되는 '동굴'이라는 것을, 햇빛을 보지 않고 마늘과 쑥을 먹으며 사람의 마음을 찾아 갔던 웅녀설화에 등장하는 그 동굴 말이다. 작은 이익에 급급해 아웅다웅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옥산서원은 '더 이상 짐승처럼 살지 말고 인간 본래의 한마음을 찾아 참된 사람으로 살라' 고 가르치고 있었다.



                                                      2016.04.25. 월요일 중앙일보  성균관대 동양학부 교수 이기동





                                                                                옥산서원유물관



























                                                                   옥산서원 정문인  역락문(亦樂門, 외삼문)


마을에서 옥산서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냇물을 건너야 한다. 냇물을 건너는 것은 속세에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를 표하는 것이기도 한다. 냇물을 건너면 옥산서원의 정문인 역락문(亦樂門)이 나온다. '역락(亦樂)'이란 논어에서 나오는 글귀다. 공자는 이 세상에 가장 기쁜 일은 부귀영화를 얻는 것도, 고관대작이 되는 것도 아니라 학문을 통해 군자가 되는 길이라고 했다. 그 기쁜 길을 여럿이 모여 함께 가면 더욱 즐겁다. 그 즐거움 마음이 역락이다.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즐거운 것이 또 있겠는가 말이다



                                                                            역락문(亦樂門) 편액















                                                                                  무변루(無邉樓)



                                                                                  무변루(無邉樓)






                                                                                                    무변루(無邉樓) 편액          



                                                                  오른쪽에 있는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민구재(敏求齋) 현판


'민구'란 민첩하게 진리를 구한다는 뜻이다. 특히 민구란 논어의 "나는 나면서부터 알았던 사람이 아니다."


                                                                  오른쪽에 있는 기숙사인 민구재(敏求齋)



                                                                        왼쪽에 있는 기숙사인 암수재(闇修齋)



'암수'란 남몰래 묵묵히 수양한다는 뜻이다.


                                                                             암수재(闇修齋) 현판






                                                                          사적 제154호 _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이 서원은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後進)을 교육하기 위해 조선 선조(宣祖) 5년(1572)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

  경내에는 사당인 체인묘, 강당인 구인당(求仁堂), 기숙사인 동재(東齋, 민구재, 敏求齋)와 서재(西齋, 암수재, 闇修齋), 무변루(無邊樓), 역락문(亦樂門), 어서각(御書閣), 장서각인 청분각(淸芬閣)과 회재 선생의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건물 곳곳에는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석봉(石峯) 한호(韓濩),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등의 명필이 쓴 현판들이 있다.

  이 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각 건물들의 건축적의미는 크지 않지만 공간적 배치방법이 돋보인다.

 옥산서원에서  복쪽으로 700m 떨어진 곳에 회재의 별장이자 서재(書齋)였던 독락당(獨樂堂)이 있다.



                                                                             사적 제154호 _ 경주 옥산서원 (慶州 玉山書院)

 

 * 옥산서원 2층 다락 건물인 무변루에서 본 학습강당 구인당 건물. 왼쪽은 암수재, 오른쪽은 민구재다. 두 건물은 유생들의 기숙사이다. 구인당 전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은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글씨다.






                                                                             옥산서원 정면에 걸린 "옥산서원" 편액

 

* 옥산서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선조 임금이 사액하고,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쓴 글이다



                                                                      석봉 한호가 쓴 구인당(求仁堂) 편액

 

  *  강학당 안쪽의 "求仁堂(구인당)" 이란편액은 석봉 한호(韓濩)가 쓴 글인데, 이언적의 구인록에서

     따온 말로 "마음과 덕과 지식의 근본을 구한다' 는 뜻이라 한다.








                                                                 마루 올라가야 보이는 뒤편의 "옥산서원" 편액

 

* 1573년 옥산서원이 처음 세워졌을 때 선조(재위 5년) 임금이 사액하고, 당시 영의정이던 이산해가 쓴 것이다.

   옥산서원이 화재로 소실되자 편액도 불타버린 줄 알고 임금이 다시 내려주었는데, 사실은 원래 편액을 잘 보관했기 때문에 사액받은 편액이

    2개가 되었다고 한다.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文元公晦齋李彦迪神道碑) 비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76-2호 _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文元公晦齋李彦迪神道碑) 표지석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76-2호 _ 문원공회재이언적신도비 (文元公晦齋李彦迪神道碑)

 

지정일 : 2006.01.02

시   대 : 조선시대



* 문원공 회재 이언적(1491~1553)은 중국 중종, 명종대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로 동방오현 중 한사람으로 꼽힌다.

  주자의 주리론에 근본을 두었으며 그의 이부위설은 이후 퇴계 이황에 의해 계승, 발전되어 영남학파 성리학의 선구가 되었다. 이 신도비는 이언적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후학들의 뜻을 모아  건립한 것이다. 비문은 호남의 거유였던 고봉 기대승이 짓고, 아계 이산해가 썼다. 비의 전체높이는 320cm이며, 비신의 높이는 204cm이다.






                                                                                     체인문(體門)



                                                      회재 (晦齋, 李彦笛, 1491~1553)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



                                                      회재 (晦齋, 李彦笛, 1491~1553)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體仁廟)

 

구인당 뒤에는 체인묘(體仁門)이 있고, 체인문 안에는 체인묘(體仁廟)란 현판이 걸려 있는 사당과 전시청이 있다. '체인'이란 인을 몸으로 체득하여 인의 마음이 몸 밖으로 배어나오는 상태를 말한다



                                                                                경각(經閣)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經閣)에는 어서(御書), 내사본(內賜本), 토계수필(退溪手筆), 각종 서적들이 봉안하고 있다.


 

                                                                                경각(經閣) 현판



                                                                                경각(經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