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보물

보물제213호_삼척 죽서루 (2014.08.02)

기리여원 2014. 8. 12. 10:10

     

보물 제213호 - 삼척 죽서루(竹西樓)

 


관동팔경의 제일루 죽서루

 

 竹西樓의 유래

 

 현재 삼척시 성내동 오십천 절벽 위에 위치한 보물 제213호인 죽서루(竹西樓)는 누각(樓閣)이다. 누각이란 일반적으로 기둥이 층 받침이 되어 마루가 높이 된 중층(重層)의 다락집을 말한다. 보통 누각의 1층바닥은 자연상태 혹은 기단으로 남겨두고 그 상층에 우물마루 바닥이나 온돌바닥을 깔았다. 이러한 누각은 그 기능상으로 볼 때 여러 종류로 분류 할 수 있으나, 죽서루는 조선시대에 일종의 관아시설로 활용된 누각이었다고 하겠다.  즉 조선시대 삼척부의 객사(客舍)였던 진주관(眞珠館)의 부속건물이었다. 객사란 지방에 파견된 중앙 관리들이 묵던 숙소를 말한다. 따라서 조선시대 죽서루는 공공시설로서 접대와 향연을 위한 장소로 활용되었다. 물론 삼척 지방 양반 사대부와 삼척을 찾아오는 시인 묵객들의 정신 수향을 위한 휴식공간으로도 사용되었다.

 

 이 죽서루는 건물 자체의 오래된 역사나 웅장함 뿐만 아니라 주위의 뚜어난 경관으로 인하여 일찍부터 관동팔경 중 제1경으로 꼽혀 사시사철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서루(西樓) 혹은 죽루(竹樓)라고도 일컬어진 죽서루가 언제 누구게 의해 처음 건립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누각 동쪽에 있는  옛날 죽장사(竹藏寺)라는 절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만 전해오고 있다.  또 일설에는 죽죽산(竹竹山)이라는 명기(名妓)의 집이 누각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죽서루라고 이름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 명종 대(1171-1197)의 문인인 김극기(金克己)의 시 중에 죽서루 관련 시가 전해오고 이쓴 것을 보면 12세기 후반 이전에 창건되었음은 분명하다. 또 고려말의 인물인 이승휴(李承休) . 안성(安省) .김구용(金九容) .정추(鄭樞)등이 죽서루 관련 시를 읆은 것을 보면 죽서루는 고려말에도 건재하였음을 알수 있다. 그러나 죽서루는 여말선초의 혼란기에 허물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 허물어진 죽서루는 조선 태종3년(1403) 당시 부사였던 김효손(金孝孫)에 의해 옛 터에 다시 건립되었다.

 

 죽서루 입구

 

관람일시 : 2014.08.02.토요일

관람시간 : 11:30~12:17 (소요시간 47분)

 

 

 


 

 


 죽서루 안내도

 


보물 제213호 _ 죽서루(竹西樓) 표지판


 

 

 


보물 제213호 - 삼척 죽서루(竹西樓)


시대 : 조선시대

지정일 : 1963.01.21

이 건물은 창건자와 연대는 미상이나 <동안거사집>에 의하면, 1266년(고려 원종 7년)에 이승휴가 안집사 진자후와 같이 서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는 것을 근거로 1266년 이전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 조선 태종 3년(1403)에 삼척부의 수령인 김효손이 고쳐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누(樓)란 사방을 트고 마루를 한층 높여 지은 다락형식의 집을 일컫는 말이며, '죽서'란 이름은 누의 동쪽으로 죽장사라는 절과 이름난 기생 죽죽선녀의 집이 있어 ‘죽서루’라 하였다고 한다.

규모는 앞면 7칸·옆면 2칸이지만 원래 앞면이 5칸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지붕도 천장의 구조로 보아 원래 다른 형태의 지붕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지만 재료 형태는 다른 양식을 응용한 부분이 있다. 또한 기둥을 자연암반의 높이에 맞춰 직접 세운 점도 특이하다.

이 누각에는 율곡 이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유명한 학자들의 글이 걸려 있다. 그 중 ‘제일계정(第一溪亭)’은 현종 3년(1662)에 허목이 쓴 것이고,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숙종 37년(1711)에 이성조가 썼으며 ‘해선유희지소(海仙遊戱之所)’는 헌종 3년(1837)에 이규헌 쓴 것이다.

주변 두타산의 푸른 숲, 삼척시의 서쪽을 흐르는 오십천이 내려다 보이는 절벽 위에 있어 예로부터 관동팔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보물 제213호 - 삼척 죽서루(竹西樓)



보물 제213호 - 삼척 죽서루(竹西樓)


 

 

 


 


 

 보물 제213호 - 삼척 죽서루(竹西樓)



 송강 정철가사 터 표석

 

 문화광광부에서는 1991년 2월 송강정철의 달로 정하고 우리나라 가사문학에 커다란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표석을 2개소에 세웠다.

  하나는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8경의 하나인 삼척 죽서루 경내이고, 다른 하나는 <성산별곡>의 무대인 전남 담양의 식영정 부근이다.

 삼척과 담양에 세워진<송강 가사의 터>표석은 종전의 일반적인 시비(詩碑)와는 달리 팔각형의 장대 표석과 8각형의 기단으로 이루어 졌는데 기단8각의 각면마다 송강의 대표작과 친필, 수결, 세움말, 가사 창작의 배경을 담아 송강의 생애와 문학에 관한 미니박물관 구실을 하도록 되어있다.


 

 

 


 

 


 

 



* 주춧돌 대신 자연암반과 자연초석을 이용하여 기둥을 세웠다.

  상층의 기둥이 20개인데 비해 하층의 기둥은 17개로 상층에 비해 3개나 적고, 하층의 기둥 길이도

  다르다.

  이것은 자연암반과 자연초석(막돌)을 이용하여 건물을 세웠기 때문이고, 기둥이 세워진 자연암반

  과 자연초석의 높이가 다르기 때문 에 기둥의 높이도 각각 다르다.


 

 

 


 

 


현판(1-1죽서루 : 숙종(肅宗)36년(1710)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글씨

 


현판(1-2)  관동제일루: 숙종(肅宗)36년(1710) 삼척부사 이성조(李聖肇)글씨

 


 


 

 

 




 

 

 


죽서루 북쪽(2칸)

 

북측면은 2칸인데 비해 남측면은 3칸으로 되어 있다. 측면 칸수의 차이가 있는 것은 자연암반의 형태에 적절하게 조화되기 위해서이고, 홀수칸인 남측면을 주출입구로 삼기 위해서다. 또한 누각 좌우의 천연암반을 이용하여 2층 누각이면 반드시 있어야 할 사다리가 없다.

 

 

죽서루 남쪽(3칸)

 


 

 


 

 


 



현판(3-1)      허목의 죽서루기

 

  * 허목(許穆:1595-1682) 조선중기의 명신, 삼척부사 역임

 

 

 죽서루기(竹西樓記)


  동계(東게界)에는 경치가 뛰어 난 곳이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곳이 여덟곳이 있으니 곧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삼일포와 해산정, 수성의영랑호, 야양의 낙산사, 명주의 경포대, 척주의 죽서루, 평해의 월솔정 등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을 유람해 본 자들이 단연코 죽서루를 제일이라 하니 무엇 때문인가. 대대 바닷가의 주군(州郡)은 관령(關嶺)을 제외하면 동쪽으로 큰 바다에 닿아있고, 그 바다 밖은 끝이 없으니 해와 달이 번갈아 뜨고 괴기(怪氣0의 변화가 무상하다. 또 해안은 모두 모래여서 혹 바다 물이 큰 못같이 선회하기도 하고 혹 기암이 우뚝 솟기도 하고 혹 무성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기도 하다. 습계(習溪)북쪽 지역으로부터 기성(棄城)남쪽 경계 지역까지 700리가 대체로 다 그러하지만 유독  죽서루의 아름다운 경치는 바다와 떨어져 있어 높은 산봉우리와 가파른 절벽이 있다.

 서쪽에는 두타산과 태백산이 있으니 높고 험준하여 푸른 기운이 짙게 감돌고 바위로 된 골짜기는 그윽하고 어둑하다. 또 하천이 동쪽으로 흐르면서 굽이쳐 50개의 여울을 이루는데 그 사이사이에는 무성한 숲과 마을이 자리잡고 있으며, 죽서루 아래에 이르면 푸른 층암 절벽이 매우 높이 솟아  있는데 말고 깊은 소의 물이 어울을 이루어 그 절벽 아래를 감돌아 흐르니 서쪽으로는 지는 햇빛에 푸른 물결이 돌에 부딪혀 반짝반짝 빛난다. 이처럼 암벽으로 된 색다른 이곳의 훌륭한 경치는 큰 바다를 구경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유람자들도 역시 이러한 경치를 좋아하여 죽서루가 제일이라고 하였던 것일까?

 관부(官府0의 고사(故事)를 살펴보아도 죽서루를 어느 시대에 지었는지 알 수 없지만, 영락(永樂)원년(1403:태종3)에 부사 김효종(金孝宗)이 페허화 된 옛 터를 정비하여 이 죽서루를 건립하였고, 홍희(洪熙)원년(1425;세종7)에 부사 조관(趙貫)이 단청하였다. 그 46년 두인 성화(成化)7년(1471:성종2)에 부사 허확(許確)이 남쪽처마를 덧대어 지었고, 또 그 61년 뒤인 만력(萬曆0 19년(1591:선조24)에 부사 정유청(鄭惟淸)이 다시 중수하였다. 태종 대인 영락 원년(1403) 계미년(系未年)부터 지금 강희(康熙) 원년(1662;현종3) 임인년(壬寅年)까지는 260년이나 된다.

 죽서루 아래에는 날에 죽장사(竹藏寺)라는 오래된 절이 있었다. 이 누각이 죽서루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개 이 때문이라고 한다. 이에 기록하여 죽서루기(竹西樓記)로 한다.

 

                                                                 현종3년(1662) 임인년(壬寅年) 월 일

                                                                 행도호부사 허목이  기문(記文)을 쓰다.

 

 


판(1-3)  해선유희지소 : 현종(憲宗) 3년(1837)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글씨

 


현판(1-5)  제일계정 : 현종(顯宗)대(1660-1662) 삼척부사 허목(許穆)글씨

 


 

 


 


 

 


 

 


 

현판(1-3)  해선유희지소 : 현종(憲宗) 3년(1837) 삼척부사 이규헌(李奎憲)글씨

 


 

 


 



 



 

 


 

 


 

 


현판(1-4)   죽서루 :  작자미상

 


자연과 조화를 이룬 건축

 

* 한 건물에 2가지 건축양식을 조화시켜 통일성과 변화를 추구하였다.

  죽서루의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의 두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5칸은 주심포로 되어 있으며 좌우로 한칸씩 증축된 곳에는 익공을 채택함으로써 통일성과 함께 변화도 추구하고 있다.

 

 한  기둥에만 동남쪽 귀공포의  장여뺄목에 황룡과 청룡을 조각하여 한국적인 해학미를 살리고 있다

 


익공 양식

 


 주심포양식


 죽서루 공포는 주심포와 익공의 두가지 양식으로 되어 있다. 원래의 5칸은 주심포로 되어 있으며 좌우로 한칸씩 증축된 곳에는 익공을 채택함으로써 통일성과 변화도 추구하고 있다.


 


 

 

 


 

 


 

 


 

 


 


 

 


 

 


 

 


용문바위와 성혈유적

 

 죽서루 동쪽 옛 연근당 자리 가까이에 있는 바위문, 행초소로<龍門>이라 새긴 음각글씨가 남아 있으며, 바위상부에 성혈유적이 있다. 성혈은 풍요와 다산을 의미하는 선사시대의 상징물이지만 조선시대에 와서는 민간신앙으로 정착되어 득남의 기원처로 변모하게 된다. 즉, 칠월 칠석날 자정에 부녀자들이 성혈터를 찾아가서 일곱 구멍에 좁쌀을 담고 치성을 드린 후 좁쌀을 치마폭에 감추어 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믿는 민간신앙이다. 용문바위의 성혈은 크기가 직경 3~4cm 정도의 크기로 10개가 만들어져 있다.




 

성혈 유적  

     

용문바위의 성혈은 크기가 직경 3~4cm 정도의 크기로 10개가 만들어져 있다.

 

 

 


 

 


 


 

 

 


삼척읍성지 표석

 


 

 


 

 


 



 

 


 

 


 


 

여기까지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척향교로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