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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81_예산 수당 이남규선생 고택 및 기념관 (2015.03.29)

기리여원 2015. 4. 4. 13:31

 

 

 

 

 

 

 

이남규선생 고택 전경

 

 

 

 

 

 

 

 

충청남도 민속문화재 제281호 _ 예산 수당고택 (禮山 修堂古宅)

 

수당고택은 아계 이산해(1539~1609)의 손자 이구(1586~1609)의 부인 전주이씨(1588~1668)가 아계의 묘소 근처인 현재의 곳에 1637년 창건하였으며, 1846년 중수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배치 및 평면구성에서 이 지역 반가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수당 이남규(1855-1907) 등 4대 충절인물 배출하는 등 건축적, 역사적 가치가 크다.

17세기 이후 생성된 다량의 고문서와 집안 유물들은 수당가의 변화와 조선후기 사회경제 상황의 실제를 잘 보여주는 등 사회문화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글 문화재청

 

 

 

 

사랑채(평원정)

 

 

 사랑채(평원정)

 

 

서예가 일중(一中) 김충현(金忠顯, 1921~2006) 선생의 글인 '평원정(平遠亭)" 편액

 

 

 

 

 

사랑채 마루 왼쪽에  "靑左山居(청좌산거)" 오른쪽에 "紅葉山居(홍엽산거)"의 뜻은 "동쪽에서 해가 뜨니 푸르름이 느껴지고, 서쪽으로 해가지니 단풍이 든다" 는 우주 삼라만상의 이치를 알린다는 뜻이다

 

 

 

 

 

 

해우소

 

 

뒤애서 본 사랑채(평원정)

 

 

 

 

 

 

 

 

가지가 굵은 탱자나무

 

 

 

 

 

 

 

 

 

 

 

 

 

 

 

 

 

 

 

 

 

 

 

 

 

 

 

 

 

 

 

 

 

 

 

 

 

 

 

 

 

 

 

 

 

 

 

 

 

 

 

 

 

 

 

 

 

 

 

 

 

수당(修堂) 기념관

 

士可殺 不可辱(사가살 불가욕)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

 

 

 

 

 수당기념관 소개

 

수당(修堂) 이남규(李南珪:1855~1907) 선생은 전통 있는 선비 가문에서 태어나 조선시대 말기 일제침략이라는 민족적 위기에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앞장섰던 분이다. 일제의 회유에도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결국 그의 아들, 가마꾼과 함께 만행에 순국하였다.

 

수당기념관은 수당이 실천한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의 고귀한 정신을 널리 알리고 이를 계승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 또한 수당4대 [이남규(李南圭)·이충구(李忠求) 이승복(李昇馥)·이장원(李章遠)로 이어진 애국.호국활동을 소개하고 이를 통하여 수당가(修堂家)의 독립.호국정신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였다.

 

나아가 수당가에 전해오는 선대유물 및 고문서등을 살펴봄으로써 수당의 정신사적 의미를 알게 하고 오늘날 이 지역의 자라나는 세대에게 애국 애족정신과 독립정신을 계승해 나갈 수 있도록 교육과 체험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수당가의 애국정신

 

1대(代) 이남규(李南珪)

  - 1855 서울 미동에서 출생

  - 1899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됨

  - 1906 홍주의병에서 선봉장으로 임명됨

  - 1907 아들 이충구와 시자(侍者) 김응길과 함께 아산 평촌에서 순국

  - 1962 건국공로훈장 독립장 추서

 

2대(代) 이충구(李忠求)

   - 예산 대술면 상할리 출생

   - 수당의 장남으로 의병활동에 참가

   - 1907 이남규와 함께 아산 평촌에서 순국

   -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3대(代) 이승복(李昇馥)

   - 1907년 13세때 수당과 유재공 참변을 당함

   - 연해주와 상해에서 독립운동 전개

   - 1922년~1927년 귀국후 조선.동아 및 신간회에서 활동

   -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4대(代) 이장원(李章遠)

   - 1950년 해병사관후보생으로 입대

   - 1951년 6.25 전쟁시 원산에서 사망 순국

   - 1953년 충무무공훈장 추서

 

 * 김응길 <金應吉, 수당공의 시자(侍者)>

  - 1907년 수당선생과 함께 순국

  -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수당 이남규 선생 가문, 이충규, 이승복, 이장원까지 4대 현충원안장

 

 

수당 이남규의 연보

 

 1855    서울 미동(尾洞)에서

           이호직(李浩稙)과 청송심씨 사이에 맏아들로 태어남

 

 1875    향시(鄕試) 사마시(司馬試) 양과(兩科) 합격

 

 1882    정시(庭試) 춘당대시(春塘臺試)에서 문과(文科) 급제

 

 1894~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응교(應敎)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丞旨)

           공조참의(工曺㕘議)·형조참의(刑曺㕘議)

 

 1896    안동부관찰사(安東府觀察使)

 

 1899    비서원승(秘書院丞) 궁내부(宮內府)

            특진관(慝進官), 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

 

 

 

 

 

 

 

수당 이남규선생 고택에서 우측으로 50m 가면 예산 상항리 석불이 나옵니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 _예산상항리석불 (禮山上項里石佛) 표지판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9호 _예산상항리석불 (禮山上項里石佛)

 

타원형의 평평한 돌에 새긴 것으로 마애불과 비슷한 형식의 불상이다.

둥글넓적한 얼굴에 눈과 입을 가는 선으로 작게 표현했지만 미소를 띠고 있다. 몸은 입체감 없이 평면적이며 양 어깨는 둥글게 처리되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계단식의 옷주름을 투박하게 나타냈고, 가슴과 배 아래에 띠매듭이 있다. 앉은 자세는 양 발을 무릎 위에 올리고 발바닥이 하늘을 향한 모습인데, 오른발의 처리가 조금은 어색하다.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는 선으로 표현하고 있다. 머리광배 좌우에 각각 4구씩 작은 부처를 새겨 넣었고, 몸광배에는 꽃과 잎이 큼직한 연꽃 줄기를 두드러지게 나타냈다.

광배와 불상을 하나의 돌로 만들었는데 평면적이면서 방형적(方形的)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의 좋은 예이다.

 

글 문화재청

 

 

 

 

 

 

 

 

이남규 선생 고택입구에 있는 효부 성균 진사 이상빈처 신씨지문

 

 

부 성균 진사 이상빈처 신씨지문, 효주 신씨지문

 

'청허(淸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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