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튀르키예

튀르키예 에페스 아야술룩 성과 사도요한 교회

기리여원 2022. 12. 26. 12:05

에페스 아야술룩 성과 사도요한 교회

 

비잔틴 시대에 이 도시는 하기오스 테오고로스라불렀지만 셀주크인들은 이 곳을 아야술룩이라 하였고 1950년부터 셀축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다. 고대 아크로폴리스(도시국가 폴리스에 있는 높은 언덕)에 서있는 아야술룩 성채 동쪽 경사면에서는 선사시대의 흔적과 미케네시대의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로마시대에는 이곳을 네크로폴리스(공동묘지)로 사용하였으나 비잔틴시대에는 성채를 세웠다. 성채안에는 예배당과 작은 모스크, 목욕탕, 많은 저수조등이 있었다.

 

13세기 투르크인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면서 성벽을 수리하고 아크로폴리스에 새로운 도시를 만들었는데 성벽은 많은 탑으로 둘러싸여 요새화되었고 동쪽과 서쪽에 두 개의 문이 있었다.

 

서쪽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사도요한교회는 비잔틴시대의 걸작 중에 하나이다. 역사가인 에우세비오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쫓겨나던 37-42년 그리스도는 사도요한에게 어머니인 마리아를 부탁하였고 그는 마리아와 함께 에페스로 와서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언과 복음서를 썼다. 사도요한이 죽은 뒤 그는 아야술룩 언덕에 묻혔고 그 무덤위에 작은 교회를 만들었는데 6세기경에 비잔틴 황제 유스티니아누스(527~565)와 그의 부인인 테오도라가 거대한 교회를 다시 세우게 되었다.

 

십자가의 형태의 바실리카에는 6개의 돔이 있었고 거대한 기둥으로 받쳐져 있으며 중앙 돔 아래에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었다. 세 개의 회중석이 있는데 푸른 무늬 대리석 기둥들이 줄지어 서었었고 기둥에 새겨진 모노그램(두개이상의 글자를 합쳐 한 글자 모양으로 도안화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와 그의 부인의 이름으로 만든 것으로 그 시기를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 이 기둥들은 아치형의 천장과 연결되어 위층을 받치고 있었다. 중앙에 위치한 사도요한의 무덤이 있던 방은 두 개의 계단으로 지면보다 높게 위치하였으며 작은 돔을 지지하고 있는 4개의 나선형의 기둥이 있다. 방에는 여러 가지 색상의 대리석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었지만 일부만 남아있다. 그러나 남은 일부만 보더라도 당시 바닥의 모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시대에는 애프스(건물이나 방에 반원 혹은 반원에 가까운 다각형 모양의 내부 공간)옆의 작은 창문에서 나오는 먼지가 환자를 치유한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교회는 성지순례의 중요성지가 되었다.

 

교회 서쪽은 나르텍스(배랑 혹은 현관부분)와 엑소나르텍스(외랑, 나르텍스의 바로 앞)가 있었고 여느 교회와 마찬가지로 서쪽 입구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잘 구며진 아트리움(안마당)으로 연결된다. 아트리움은 위부분이 막한 주랑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가운데 부분은 개방되어 있었다. 서쪽 주랑 밑에는 세 개의 물탱크로 된 큰저수조가 발견되었는데 근처 이사베이 모스크를 만들 때 창고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아트리움과 이사베이 모스트 사이에는 많은 방이 있던 또 다른 교회를 발견하였는데 이곳은 아마도 5세기경 교회 주교의 거주공간으로 사용하였을 것이다. 

 

7세기에 아랍인들이 침입하였을 때 교회를 보호하기 위하여 주변에 성벽을 쌓아 북쪽의 아야술룩성과 연결시켜 마치 성벽안쪽에 요새처럼 보여 지도록 했다. 14세기 에페스를 방문한 아랍인 여행자 이브니 바투타에 의하면 이 교회는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였다 한다. 하지만 이사베이 모스크가 지어진 후에는 이곳은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고 14세기 말경에 있었던 지진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남쪽으로는 작은 뜰이 있고 도시와 연결되는 박해의 문이라 불리는 입구가 있는데 두 개의 높은 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해의 문 외부에 장식되어 있던 프리즈(띠 모양으로 장식한 부분)는 영국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옮겨졌으며 현재 영국 버번 아비 갤러리에 소장되었다.

교회의 첫 번째 발굴은 고고학자 소티리우에 의하여 1921~1922년에 이루어졌고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고고학연구소에 맡겨졌으며 교회 회중석의 이층의 기둥들이 세상에 나오게 되었다. 1976년부터는 에페스 박물관에서 발굴과 복원작업을 계속 하였다, 그 결과 이곳은 고대유적이 위치한 공원으로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아오고 있다.

 

사도요한 교회 박해의 문

 

이 문은 요한의 교회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리석 부분을 에베소의 경기장에서 가져온 것인데, 야수와 전사들의 결투를 즐기던 3-4세기의 로마인들에게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에서 야수들의 제물이 되었던 것이다.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비잔틴 시대에 기독교인들이 이 경기장으로 달려가서 그 대리석들을 부수어 박해의 문을 지은 것이다.

 

박해의 문에서 본당으로 올라가는 돌게단

 

 

사도요한 교회의 본당

 

 

본당의 문

 

 

아야술룩(Ayasuluk) 성채

 

 

아야술룩(Ayasuluk) 성채

 

 

 

 

사도요한 교회의 본당과 무덤

 

 

사도요한의 무덤

 

 

사도요한의 무덤

 

 

사도요한의 무덤 표지석

 

사도 요한의 무덤은 교회 동쪽 끝에 있다. 네 개의 기둥이 세워진 그의 무덤 대리석 석판에는

“이곳은 나의 영원한 쉴자리, 여기서 살게 될 것이다”라는 글귀가 있다.

 

사도요한 무덤과 교회 본당

 

 

 

 

사도요한의 교회 본당

 

 

 

 

 

 

 

 

 

 

사도 요한의 세례터

 

 

장례를 진행하던 공간

 

 

 

 

 

 

 

 

 

2022.12.05. 튀르키예 에페스 아야술룩 성과 사도요한 교회

'청허(淸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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