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서원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_창렬사(2019.01.20)

기리여원 2019. 1. 26. 11:13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지정일 : 1983.07.20

시   대 : 조선시대

소재지 : 경남 진주시 남성동 212-8번지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다.

정사호가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모셨다. 이밖에도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등 39분을 모시고 있다.

김시민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11년(1578)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성 싸움에서 적을 격파하고 빼앗겼던 여러 성을 회복하였다.

김천일은 조선 중기 문신이며 의병장이다. 선조 6년(1573)에 학문이 뛰어나 발탁되었으며 선조 26년(1593) 명나라 군대가 평양을 수복하고 개성으로 진격할 때 도왔다. 1차 진주성 싸움의 패배를 극복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성은 함락되고 김천일은 남강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황진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선조 5년(1572)에 무과에 합격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진주성 싸움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최경회는 임진왜란 때 의병장이었으며 진주성 싸움에서 황진, 김천일과 함께 전사하였다


창열사 (彰烈祠) 표지판



 창열사 (彰烈祠)의 외삼문인 유중문(有重門)


임진왜란 당시 계사년(1593)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분들의 신위를 모시기 위해 선조 40년(1607)에 건립된 사액(賜額)사당으로 정사호(鄭賜湖)가 건립했습니다. 이곳에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의 신위를 맨 윗자리에 모시고 창의사 김천일(金千鎰) 충청병사 황진(忠淸兵使 黃進), 경상우병사 최경회(慶尙右兵使 崔慶會)등 39분의 신위를 모시고 있습니다.

진주성 서쪽에 있는 창렬사는 정사(正祠)인 창렬사(彰烈祠)와 양쪽에 동사(東祠)와 서사(西祠)가 자리하고 정면으로 출입문이 나 있는 ㅁ자형 배치입니다. 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는 임금이 지어 내린 제문의 비가 있고, 왼쪽에는 경충당과 관리사가 있습니다. 매년 음력 3월 초정일(初丁日)에 진주시 주관으로 39분 배위들의 후손들이 제를 봉행하고 있습니다.


 창열사 (彰烈祠)의 외삼문인 유중문(有重門) 현판






창열사 (彰烈祠)의 내삼문인 전파문(傳葩門)



창열사 (彰烈祠)의 내삼문인 전파문(傳葩門) 현판



창렬사중건기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임진왜란 때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전사한 분들을 모시기 위한 사당이다.

정사호가 세웠으며 조선 선조 40년(1607)에 사당의 이름을 임금이 지어(사액) 내렸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김시민 장군(1554∼1592)을 모신 충민사가 없어지자 창열사에 모셨다. 이밖에도 창의사 김천일(1537∼1593), 충청병사 황진(1542∼1606), 경상우병사 최경회(1532∼1593) 등 39분을 모시고 있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호 _ 창열사 (彰烈祠)















동사(東祠)



서사(西祠)











글 문화재청. 팜플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