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지정문화재

독립운동가_의병장 이현규

기리여원 2020. 12. 5. 14:09

독립운동가 _ 의병장 이현규

 

대한제국기 경상북도와 강원도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이현규

 

본관은 재령(載寧). 일명 능우(能雨). 자는 하현(夏玄 또는 夏鉉), 호는 우해(于海)·내산(奈山). 아버지는 수단(壽檀)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강제체결되자, 12월 중순 울진의 불영사(不影寺)에서 안동·청송·진보·영양 등지에서 모여든 500여 명의 병력으로 창의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먼저 주왕산과 청량산 등에서 이들을 훈련시킨 뒤, 1906년 2월 영양군 입안면 교리에서 본격적인 의병진을 편성했다.

 

유시연(柳時淵)·신형일(申亨一)·김대규·권대성(權大成) 등과 함께 일본군과 수십 차례 교전했다. 그해 4월 진보 근처 오누저수지에서 강원도·경상도 의병의 진압책임자인 일본 헌병 부토[武藤]가 이끄는 헌병부대와 교전하여, 치열한 전투 끝에 파천면 어천까지 추격하여 부토 이하 수십 명을 사살했다. 이 전투에서 심한 부상을 당한 그는 다시 의병을 정비한 후, 5월 울진·죽변에 있는 왜관을 격파하고, 영양의 북쪽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일본군 증원부대의 역습으로 도포장 김대규 이하 많은 의병을 상실했다. 이에 의병진을 수습하여 후퇴한 후 재기를 약속하고 해산했다.

 

이처럼 독립의진으로서 활약하는 한편, 신돌석 의진과 연합하여 그 돌격장으로 활약하여 영해성을 함락하는 큰 공을 세웠다. 그후 영일군 청하면 모진리에 피신하여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글방에서 2세 교육에 주력하는 한편, 항일구국사상을 고취시키며 재기를 도모했지만, 총상으로 인한 여독으로 순국했다. 1968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의병장 이현규표지판

 

 

의사내산이공현규지묘(義士奈山李公鉉圭之墓)

 

 

독립운동기념비 _ 의병장 이현규

 

 

독립운동기념비_의병장 이현규

 

 

독립운동기념비 앞 양옆의 문인석

 

 

독립운동기념비 앞 양옆의 문인석

 

2020.11.29.일요일, 영양 석보면 지경리

글 다음백과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