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찰

보은 법주사 복천암

기리여원 2021. 2. 11. 18:21

보은 법주사 복천암에 있는 문화재

 

1. 보물 제1416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2. 보물 제1418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3.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4.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5.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6.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보은 법주사 복천암전경

 

복천암(福泉庵)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산내 암자이다. 720년(신라 성덕왕 19)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공민왕(재위:1351∼1374)이 극락전에 무량수()라는 편액을 친필로 써서 내렸다. 조선 세조가 1464년 이 절에서 신미()·학조()·학열() 등과 함께 3일 동안 기도를 드린 뒤 절에 이르는 길목의 한 목욕소에서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깨끗이 낫자 이 절을 중수하도록 하고, ‘만년보력()’이라는 사각옥판을 내렸다 한다. 1592년(선조 25) 불에 탔으나 곧 중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극락전과 나한전·선방·요사채 등이 있다. 그 중 극락전은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곧 중건한 건물로 공민왕의 친필인 무량수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유물로는 부도 2기가 전한다. 그 중 복천암수암화상부도는 1480년(성종 11) 제작된 것으로 신미의 부도이다. 팔각원당형 부도로 충청북도 보물 제1416호로 지정되었다. 이 부도 뒤에 있는 복천암학조등곡대사부도는 1514년(중종 9)에 제작된 것으로, 일반적인 석종형 부도보다 훨씬 발전된 형식을 띠고 있어 보물 제1418호로 지정되었다. 한편 절 옆 큰 바위 틈에는 절 이름과 관련있는 샘인 복천이 있다.

 

- 두산 백과-

 

세조와 신미대사

 

세조가 수양대군 시절 세종의 명으로 석보상절 편찬 작업에 함께 참여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이 당시 편찬된 책자들은 초기 한글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자료로 사용이 되었습니다. 이 인연으로 사제의 연을 맺었고, 세조가 불교에 귀의하여 마음의 평안을 찾는데 함께 하였습니다. 현재 복천암에 신미대사 부도탑이 있습니다.

 

 

복천암 가는 이뭣꼬다리

 

 

보은 법주사 복천암 안내 표지판

 

 

복천암 진입 경사로

 

 

복천암 전경

 

 

복천암 요사체

 

 

복천선원(福泉禪院)

 

 

보은 법주사 복천암의 본당인 극락전 편액 '무량수(無量壽)'는 고려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어필이다.

 

 

복천암 약수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298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극락보전 (報恩 法住寺 福泉庵 極樂寶殿)

 

복천암은 사적기에 의하면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었으며 고려 태조 1년(918) 證通國師가, 선종 1년(1084) 導生僧痛, 예종 2년(1107)에 慈淨國尊이 중수하고, 조선 세종 31년(1449)에 信眉禪師가 중수하였다.

수차례에 걸쳐 중건되다 소실된 것을 영조 11년(1735)에 卓融禪師가 소실된 것을 재창하였으며 순조 3년(1803) 就俊師가 중수하였다.

복천암극락전은 1976년 해체 복원하였으며 내부에는 아미타불상과 후불탱화, 신미대사의 탱화가 보존되어 있으며 현판 무량수(無量壽)는 공민왕 친필로 전한다.

初築 당시 기단위에 조선시대 양식으로 복원하였으며 정면3칸 측면3칸 맞배지붕으로 전형적인 조선시대 불전을 구성 하고 있다. 이 건물의 특이한 점은 내부의 고주와 이를 중심으로 구성된 불감이다. 불전 내부 예불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불단을 놓는 방법은 부석이나 불갑사처럼 측면으로 놓는 예를 제외하면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불단의 전면 예불공간을 넓히기 위해 내부의 고주를 이동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고주법은 고려 중・후기부터 우리나라에 사용된 것으로 짐작되며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예가 많아지다가 조선후기에는 正直法에 비해 많은 사례를 남기고 있다. 건물의 평면이 작은 경우는 아예 불단을 뒷벽에 붙이는 후치법도 자주 등장한다.

인근에 寶物 제1416호 福泉庵秀庵和尙塔와 寶物 제1418호 福泉庵學祖燈谷和尙塔이 있다.

법주사 복천암극락보전은 조선후기 다포계 맞배집 구조임에도 불구하고 측면에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이것은 조선시대 중·후기에 이 지역을 중심으로 희귀하게 건립된 것으로 전국에 20여동 밖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형태로서 공포, 내부구성 등 건축양식이 뛰어나 건축기술사에서의 가치성이 높다.

 

복천암 극락보전(福泉庵 極樂寶殿)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7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삼세불도 (報恩 法住寺 福泉庵 三世佛圖)

 

사적기에 따르면,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태조 1년(918) 證通국사, 선종 1년(1084) 導生僧痛, 예종 2년(1107) 慈淨國尊에 의해 각각 중수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는 세종 31년(1449) 信眉선사가 중수했고, 영조 11년(1735)에 소실된 암자를 卓融선사가 재창하였으며, 순조 3년(1803) 就俊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복천암 극락보전 후불도는 1909년(隆熙 3)에 제작된 것으로, 389㎝(세로)×286㎝(가로)의 규모의 석가모니불․약사불․아미타불을 한 화면에 모신, 통칭 삼세불도이다.

화면구성은 세 여래를 중심으로, 하단에는 각 여래마다 2位의 脇侍보살과 2大天王이 있고, 상단에는 역시 2大天王과 8位의 弟子像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불화의 색채는 赤色과 綠色 위주이며, 일부 藍色이 설채되어 있다. 이외 몇 가지 색채가 사용되었으나, 18세기에 비해 비교적 단조로운 배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녹색의 경우는 이 시기 대부분의 불화에서 볼 수 있듯 안료의 결함으로 인해 색이 균일하지 않다. 현재 보존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화면 상단 아미타여래의 두․신광배에 얼룩이 있으며, 이외 몇 곳에 유사한 자국이 있다.

이 불화의 특징은 화면구성상 도상의 배치에서 찾을 수 있다. 중앙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각 약사불․아미타불이 석가모니불의 뒤로 물러나 묘사되어 있으며, 크기도 석가모니불에 비해 작다. 이것은 평면상에 회화적 입체감을 형성한 것으로 近代佛畵에 서양화법이 도입되면서 화면구성에도 적용된 것이다.

또한 협시보살의 배치가 통례에서 벗어난 점도 특징적이다. 즉, 응당 석가모니불의 협시보살로 그려져야 할 문수․보현보살 대신, 관음․세지보살이 그려진 점이다. 이 양 협시는 아미타불의 협시보살로 통칭되나 여기에서는 석가모니불의 협시로 등장하여, 經典에 근거한 圖像的 안배보다는 殿閣의 명칭(極樂寶殿)이나 대중적 신앙 양태를 염두에 둔 도상배치의 변용으로 여겨진다.

복천암 삼세불도는 극락보전 내 아미타불 뒤에 위치하며 화기문에 의하면 융희 3년(1909) 5월 8일에 금어(金魚), 금호(錦湖), 약효(若效) 등의 화사집단이 제작한 것으로 중앙의 석가, 아미타, 약사의 삼세불을 중심으로 하단에는 팔대보살, 상단에는 제자와 권속으로 화면의 4방에는 사천왕을 배치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적색과 청색이 주색이고 황토색, 녹색, 흰색이 보조색으로 사용되었다.

화사인 약효는 19세기 후반 충청도지역의 삼세불도를 다수 제작하였는데 본 탱화는 대상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시대적 특징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제작시기가 명확하고 보존상태가 조각수법이 뛰어나고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5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목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報恩 法住寺 福泉庵 木造阿彌陀如來三尊坐像)

 

복천암 극락전의 주불로 아미타불과 관음보살, 대세지보살의 삼존상이다. 이 불상은 법당이 1733년 화재로 소실된 이후, 1735년부터 1737년까지의 중창불사 때에 법당과 함께 조성된 상이다. 1737년(건륭 2년)에 이루어진 복장 발원문은 다시 불상에 봉안되었는지 조사 때에는 볼 수 없었고, 『寺誌』(충청북도, 1982. P.254)에 수록되어 있어 참고할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이 불상을 만든 조각장은 演機, 斗策, 守性, 超鵬, 守堅, 廣鵬 등임을 알 수 있다.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상으로 하여 관음보살좌상을 좌협시보살로 그리고 대세지보살좌상을 우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삼존상은 각각 중대석이 사각인 3단 연화대좌에 봉안되어 있다.

본존상은 하품중생인의 수인을 결하고 있으며, 얼굴에 살집이 있고 특히 코가 작고 양 볼과 턱이 풍만하여 온후한 인상이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둥글게 감싼 변형 편단우견으로 속에 입은 편삼의 옷깃을 대의와 대칭을 이루게 입고 있다. 가슴에는 수평으로 입은 내의의 윗단이 보이는데 윗부분이 주름져 있다. 상체가 길쭉한 편이나 어깨는 작고 움추린 자세이다. 불신의 양감은 적당하며 옷 주름은 이에 걸맞게 적당히 투박하며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좌우 보살상은 거의 같은 모습으로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손만 좌우대칭을 이룬다. 높은 보관을 썼는데 각각의 보관에 화불과 정병이 표현되어 있어서 관음과 대세지보살상임을 구별할 수 있다. 보관 속으로 높게 묶은 보발이 있고 보발은 다시 귀를 감아 돌아 어깨 위로 몇 가닥 늘어지고 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본존상과 달리 아래턱의 살집이 적어서 갸름하고 단정한 인상이다. 불신도 작으며 법의는 여래상과 같은 형식으로 입고 있다. 관음이 들고 있는 연꽃가지 위에는 특이하게 정병이 붙어 있다.

삼존상의 대좌는 크기에서만 조금 차이를 보일뿐 거의 같은 형태로, 상단과 하단의 연판은 양감이 있으며 중대석 앞면에는 옆으로 긴 안상 안에 당초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아미타불좌상을 본존상으로 하여 관음보살좌상을 좌협시보살로 그리고 대세지보살좌상을 우협시보살로 하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극락보전 내 봉안중인 아미타불은 복천암 사적기에 의하면 건륭 2년(1737)에 두책(斗策), 초붕(超鵬), 수견(守堅), 광붕(廣鵬)등의 스님이 제작한 것으로 통견의 가사와 옷 주름 선이 간략화 되고 형식화 된 수법 등 18세기 불상의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어 조성 기록이 잘 남아 있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신중도 (報恩 法住寺 福泉庵 神衆圖)

 

사적기에 따르면, 복천암은 신라 성덕왕 19년(720)에 창건되어 고려시대 태조 1년(918) 證通국사, 선종 1년(1084) 導生僧痛, 예종 2년(1107) 慈淨國尊에 의해 각각 중수가 이루어졌다. 조선시대는 세종 31년(1449) 信眉선사가 중수했고, 영조 11년(1735)에 소실된 암자를 卓融선사가 재창하였으며, 순조 3년(1803) 就俊師가 중수했다고 전한다.

복천암 신중도(규모 ; 190㎝×158㎝)는 1795(淸 乾隆 60)년에 제작되었다. 이 불화는 원래 법주사 대웅보전에 봉안되었으나 후에 복천암으로 移安되어 이 암자의 중심전각인 극락보전의 향우측 벽면에 현괘되어 있다.

화면구성은 遠近的 群集구도를 써서 위로 가면서 화면에 등장하는 尊像들의 크기가 자연스럽게 축소되고 있다. 화면 상단 좌우에 각각 제석천과 금강천(위태천)을 부각시키고 좌우상하단에 각각 龍王․山神․日․月宮天子․明王 童女․童子․天女 등 여러 권속들이 등장하고 있다.

색채는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하였으며 부분적으로 청․황․분홍 또는 무채색이 다양하게 설채되었다.

이 신중도는 조선시대 18세기후반 불화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조선시대 18세기 불화하면, 소재․표현기법․畵格이 조선후기를 통틀어 가장 질적인 우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조선후기 신중도는 대개 帝釋․梵天, 혹은 帝釋․梵天․金剛天을 크기 면에서 대등하게 묘사하는 것이 통례인데, 이 작품은 帝釋․金剛天만의 2존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범천은 화면의 향좌측 상단에 작게 一群을 이룬 형태로 묘사하였다. 이 점은 이 불화를 그린 畵師인 愼兼이 圖像 구성에 변화를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이 불화는 재질(비단)과 구도, 채도가 높고 선명한 색채와 세필에 의한 정교한 선묘, 다양하고 섬세한 문양, 사실적인 지물이나 복식표현 등에서 18세기불화의 전형양식을 견지하고 있다. 각 존상들의 衣服바탕과 옷단에는 草花文을 비롯하여 다양한 형태의 花紋이 정교하게 들어가 있어, 비록 18세기 후반작품이지만 그 이전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畵格을 갖추었다.

이 불화를 그린 首畵師인 退雲堂 信謙은 18세기후반부터 19세기 초중반에 걸쳐 주로 경상도지역에 화적을 남기고 있는 주목받는 화사이다.

극락보전 아미타불 우측에 봉안되어 있는 신중도는 앞에는 별도의 제단이 있으며 중앙에 위태석천과 제석을 주존으로 하여 여러 무장신을 배치한 신중탱화로 주색은 적색과 녹색이며 배경으로는 황토색이 사용된 탱화이다. 위태천이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나 옆의 제석도 비슷한 크기로 그려져 있어 같은 비중을 두고 그린 것으로 18세기 후반에 유행한 제석천룡탱화로 화기문에 의하면 조선후기 대표적 화승인 신겸(信謙)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탱화로서 충청도 지역에 남아있는 드문 사례이다. 작품 제작수법이 뛰어나고 당시 대표적 화승이 작업하였으며 조성 기록이 잘 남아 있다.

 

 복천암 산신각(福泉庵 山神閣)

 

 

복천암 나한전 전경

 

 

복천암 나한전

 

 

이 데크계단으로 100m 올라가시면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을 만날수 있습니다.

 

 

수암화상탑과 학조화상탑

 

 

학조화상탑과 수암화상탑

 

보물 제1416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 (報恩 法住寺 福泉庵 秀庵和尙塔)

 

법주사 복천암 동쪽 약 200m 지점에 구축된 평평한 대지에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과 나란히 건립되어 있는데 옥개석은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에 비하여 간략한 편이나 세부 수법은 두 탑이 비슷하다. 이 탑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秀庵和尙塔(수암화상탑)'이라 하였고, 중대석에 '成化十六年 八月日立(성화십육년팔월일립)'이라고 2행의 명문이 음각되어 탑의 주인공과 조성년대를 알게 하는 점이다. 즉 성종 11년(1480)에 조성되었으며, 수암화상은 복천암과 관계된 조선초기의 고승으로 짐작된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수암화상탑은 고려시대 팔각원당형탑의 양식을 계승한 조선시대 초기의 탑으로서 조형수법이 뛰어나며, 특히 주인공의 존명과 조성년대를 탑에 직접 기록하고 있어 조선시대 탑의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기준작으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보물 제1418호 _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 (報恩 法住寺 福泉庵 學祖和尙塔)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법주사 복천암 동남쪽 구릉에 위치한 탑이다. 이 탑은 주인공의 존명과 건립년대를 기록하고 있는 조선시대 초기의 탑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탑의 형태는 팔각원당형의 고려 탑을 계승하고 있으나 탑신이 구형(球形)인 점이 크게 다르다. 팔각 중대석 두 면에 걸쳐 '正德九年 甲戌五月 日立(정덕구년 갑술오월 일립)'그리고 '學祖燈谷 和尙塔(학조등곡 화상탑)'이란 명문이 있어 조선 중종9년(1514)의 건립임을 알게 한다.

학조화상은 성종 19년(1488) 인수대비의 명으로 해인사를 중수하였고, 연산군 6년(1500)에는 왕비 신씨의 명으로 해인사 고려대장경 3부를 인행하여 발문을 짓는 등 조선전기에 활동한 고승이다.

보은 법주사 복천암 학조화상탑은 건립년대와 주인공의 존명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조선시대 탑은 탑비가 부족하여 절대년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희귀하나 이 탑은 고려 탑을 계승한 조선초기 탑양식을 알게 함과 동시에 다른 탑의 기준작이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복천암 사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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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 법주사 복천암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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