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향토유적

시흥시 안성부원군 이숙번 묘

기리여원 2023. 2. 3. 14:46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 _ 이숙번 묘(李叔番 墓)

 

지정일 : 2006.11.30

소재지 : 경기도 시흥시 금화로 353(산현동 산71)

시    대 : 조선 15세기 중반

 

이숙번(李叔番, 1373~1440)은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성(安城)이며 경(坰)의 아들이다.

1393년(태조 2)문과에 급제한 뒤 1398년 지안산군사(知安山郡事)로 있으면서 방원(芳遠 : 뒤의 태종)을 도와 사병을 출동시켜 제1차 왕장의 난에 공을 세웠다. 그 공로로 정사공신(定社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영되었으며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다.

태종이 즉위하자 제2차 왕자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이 되었으며,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1412년 말에는 종1품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진하였다. 141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듬해 의정부찬성사가 되었는데, 뒤에의정부의 직제 개편에 따라 동판의정부사(同判議政府事) · 좌참찬 · 찬성이 되었다. 한편, 1414년에는 지춘추관사로서  영춘추관사 하륜(河崙) 등과 함께 「고려사」중 공민왕 이후의 사실을 고쳐서 바로잡기도 하였다.

이듬해 아넝부원군(安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묘 앞에는 문인석상 4기, 장명등 1기 등 석물이 있으며 시흥시에서 유일한 사각형 무덤이다. 15세기 중반에 만들어진 것을 이후 개보수하는 과정에서 일부 원형을 잃었으나, 2006년에 다시 정밀발굴조사에 따라 원형을 회복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이숙번 묘 표지판

 

 

 이숙번 묘 전경

 

 

 이숙번 신도비와 제단

 

 

 이숙번 신도비(神道碑)

 

有明朝鮮國 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贊成安城君諡忠肅公安城李公諱叔番之墓 配府夫人西原鄭氏附右 (유명조선국 보국숭록대부의정부좌찬성안성군시충숙공안성이공휘숙번지묘 배부부인서원정씨부우)

 

이숙번 묘로 올라가는 나무계단

 

 

시흥시 향토유적 제18호 _ 이숙번 묘(李叔番 墓)

 

안성부원군 이숙번(李叔番)의 약사(略史)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안성이씨의 후예(後裔)로서 고려조 판전리사를 지내고 경술로 저명하였으며 좌의정으로 추증된 사정(思正|)의 현손이며 우왕 2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후세에 조선을 게국한 이성계와 고려 명장으로 널리 알려진 최영장군 등과 해풍전투와 남원전투 등 수많은 왜구와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삼중대광 문화시중 평의대장군을 지냈으며 추층정란보조공신 안성부원군에 책봉된바 있는 문정공 이경(李坰)의 아들로 고려 공민왕 22년(1373) 개축년에 탄생하였으며 조선 세종 22년(1440)에 기세한 조선 초기의 문신으로 자는 백응(伯鷹) 호는 운정(芸亭)이다.

 

안성부원군은 조선 태조 2년(1392) 개국후 최초 계유 춘장시에 급제하여 좌습유(지금의 청와대 경호원)로 출사하였고 24세때 안산(지금의 수원시 북부 안산시 시흥시 등) 군사로 부임하였으며 2년여 후 1차 세자의 난이 발발 왕자 이방원의 요청으로 군사를 이끌고 참여 난을 평정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중앙정치 권력무대 한 복판에 서게 되었다. 이때 왕자의 난 평정의 공으로 29명의 정사공신으로 책봉되었으며 문신 7명 중 5명이 개국공신이고 하륜은 정사공신 1등에 부원군은 정사공신 2등에 책록되고 안성군으로 책봉되었다.

 

박포가 왕자 방간을 충동하여 일으킨 제2차 왕자의 난을 진압하게 되는데 이들 모두에게 좌명공신 1등에 봉해졌고 두 차례의 난을 계속해서 참여해 공신의 반열에 오르게 된 문신은 하륜과 안성부원군 뿐 이었다. 군은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계기로 하여 조선 제3대왕 태종 이방원의 절대적인 신임으로 장치적으로 승승장구하며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되었으며 또 다시 태종 2년(1402)에 발발한 태조 이성계 세력의 난인 안변부사의 난을 진압하면서 다시 한번 정치적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 안변부사의 난을 진압하면서 다시 한번 정치적 위상을 공고히 할 수 있었다.

 

두 차례의 왕자의 난 안변부사의 난 등을 평정한 이후 안성부원군 이숙번의 주요 관직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태종 1년 좌명 1등공신

* 태종 2년 지 승추부사

* 태종 3년 지 의정부사

* 태종 4년 참찬 의정부사 : 지공거(과거시험관)가 되어 동지공거 유창과 함께 정초 김종서 등 33인 선발

* 태종 6년 겸 중군총제 겸 판의용 순금사사

* 태종 7년 겸 중 좌위사 상호군 겸 의흥시위사 상호군

* 태종 8년 겸 중군 도총제

* 태종 9년 동북면 절제사 참참 의정부사겸 지 의흥부사

* 태종 11년 안성군겸 지 의흥부사

* 태종 12년 종1품 숭정대부

* 태종 13년 병조판서

* 태종 14년 의정부 찬성사 동판 의정부사 좌 참찬 좌 찬성지  춘추관사로서 하륜 이제 변계량 등과 고려사 개수를 명받음.

* 테총 15년 의정부 찬성 안성부원군으로 제수

 

안성부원군 이숙번은 위와 같은 관직을 수행하면서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였을 뿐 아니라 조선 제3대왕 태종의 총애를 받으며 주요 국사를 공론 결정함은 물론 강무를 동행하였으며 조선 제4대왕 세종이 조선건국의 당위성과 왕권의 정통성에 대한 딜레마를 해소하고 태조를 위시한 선왕들의 건국 사적을 선양하고자 세종 29년에 발행되었다 라고 하는 용비어천가가 2007년 충남대학교 대학원 국어 국문학과 고전 전문전공 박찬수의 문학박사 학위취득 논문을 통하여 밝혀졌지만 용비어천가의 저자는 안성부원군 이숙번이고 이숙번의 용이버어천가가 세종시대 관찬본 용비어천가의 저본으로 사용되었다 라고 하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학계에서는 국문학 뿐만 아니라 국어학 분야에서도 한국 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작품중의 하나이다 라고 평가하므로 문무를 겸비한 시대의 인물이었으며 안산에 종편되어 머물다 세종 22년(1440) 3월 15일에 기세하였다.

 

조정에 부음이 전해지자 임금(세종)이 조정과 저자를 파하고 예관을 보내어 도감을 설치 제사를 지내게 하였으며 관곽과 송진 백지 70권을 하사하였다 라고 하는 기록을 살펴볼 때 당시 조정으로부터 깊은 관심과 예우를 받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흘러 한때는 조정의 난세와 후손들의 불명으로 묘소마저 실전한 적이 있으나 조선 21대왕 영조 병신년(1776)에 후손들의 노력으로 다시 묘소를 찾아 설단하면서 다소 원형이 훼손되기도 하였으나 2006년 12월 5일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면서 학계의 정밀 발굴조사를 통하여 원형을 회복 묘역을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문인석 2쌍 4기와 장명등 1기 장방향 석상등을 갖춘 관내 유일한 희귀성 4각형(가로 303cm 세로 393cm)묘로 설치되어 있다. 장명등은 조선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화창(火窓)은 앞뒤에 2개만 마련하고 중대석은 길상문(吉祥文)을 조각하였으나 사모지붕은 망실되어 새로 보수한 상테이다. 문인석(안쪽 문인석 높이 167cm,바깥쪽 문인석 높이 170cm)은 건원릉(建元陵)과 헌릉(獻陵)의 문인석 양식을 충실히 계승한 작품으로 복두(轐頭)쓰고 얼굴에는 미소를 짓고 있는데 홑을 잡은 양손이 옷 소매로 덮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무덤은 고려말의 매장묘 형식과 비슷해 15세기 중반 조선초기의 묘제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될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묘역 입구에는 신도비와 형토유적 안내간판(시흥시)이 설치되어 있다. 

 

자료제공 : 안성이씨 이부시랑공파종친

 

이숙번 묘(李叔番 墓)

 

이숙번 묘 앞의 석조물은 향로석, 상석, 장명등, 상부 · 하부 각각 문인석 한쌍이 위치해 있다.

 

이숙번 묘 장명등

 

장명등은 조선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화창(火窓)은 앞뒤에 2개만 마련하고 중대석은 길상문(吉祥文)을 조각하였으나 사모지붕은 망실되어 새로 보수한 상테이다.

 

이숙번 묘의 혼유석, 상석, 향로석

 

 

상부 문인석

 

 

하부 문인석

 

 

이숙번 묘의 후경

 

 

이숙번의 재실인 영모재(永慕齋)

 

2023.01.21, 시흥시 산현동, 이숙번 묘

글 안내표지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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