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사적 105

사적 제136호_강화 참성단

사적 제136호 _ 강화 참성단 (강화 塹星壇) 면 적 : 5,774㎡ 지정일 : 1964.07.11 소재지 : 인천 강화군 화도면 흥왕리 산42-1번지 마니산에 있으며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올리기 위해 쌓은 제단이라고 전한다. 고려 원종 11년(1270)에 보수했으며, 조선 인조 17년(1639)과 숙종 26년(1700)에도 고쳐 쌓았다. 여러 번 고쳐서 쌓았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제단은 자연석으로 둥글게 쌓은 하단(下壇)과 네모반듯하게 쌓은 상단(上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둥근 하단은 하늘, 네모난 상단은 땅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런 모습은 경주의 첨성대와 비슷하다. 고려와 조선왕조는 때때로 이곳에서 도교식 제사를 거행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단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

문화재/사적 2022.01.15

사적 제306호_강화 갑곶돈

강화 갑곶돈에 있는 지정문화재 1. 사적 제306호 _ 강화 갑곶돈 2. 천연기념물 제78호 _ 갑곶리 탱자나무 사적 제306호 _ 강화 갑곶돈 (江華 甲串墩) 면 적 : 65,099㎡ 지정일 : 1984.08.13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20번지 외 돈대는 작은 규모의 보루를 만들고 대포를 배치하여 지키는 곳이다. 갑곶돈은 고려가 1232년부터 1270년까지 도읍을 강화도로 옮겨 몽고와의 전쟁에서 강화해협을 지키던 중요한 요새로, 대포 8문이 배치된 포대이다. 삼국시대 강화를 갑비고차(甲比古次)라 부른데서 갑곶이라 이름이 전해오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고려 때 몽고군이 이곳을 건너려고 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우리 군사들이 갑옷만 벗어서 바다를 메워도 건너갈 수 있을 텐..

문화재/사적 2022.01.13

사적 제132호_강화산성(서문)

사적 제132호 _ 강화산성(서문) (江華山城) 면 적 : 791,740㎡ 지정일 : 1964.06.10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3번지 일원 시 대 : 고려시대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의 산성이다. 몽골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수난을 당하자, 당시 실권자인 최우는 1232년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다. 왕궁과 성·관아 시설은 1234년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개경의 궁궐과 비슷하게 지어 산의 이름도 송악이라 지었다. 성은 흙으로 쌓았고, 내성·중성·외성으로 이루어져 있고, 내성은 주위 약 1,200m로 지금의 강화성이다. 중성은 내성을 지키기 위해 쌓았으며, 외성은 1233년 강화 동쪽해안을 따라 쌓았다. 이 외성은 몽골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

문화재/사적 2022.01.12

한국 최초 한옥성당, 사적 제424호 _대한성공회 강화성당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에 있는 지정문화재 1. 사적 제424호 _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2. 국가등록문화재 제705호 _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제대 및 세례대 사적 제424호 _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大韓聖公會 江華聖堂) 면 적 : 6,968㎡ 지정일 : 2001.01.04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관청길 22 (관청리) 시 대 : 1900년대(대한제국) 대한성공회 강화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건립된 동서길이 10칸, 남북길이 4칸인 한식 중층건물이다. 이 성당은 서양의 바실리카식 교회건축 공간구성을 따르고 있으나 가구 구조는 한식 목구조와 기와지붕으로 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구조와 외관을 한국전통 건축양식에 적응시킴으로서 외래종교에 대한 거부감을 완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공..

문화재/사적 2022.01.11

사적 제133호_강화 고려궁지

강화 고려궁지에 있는 지정문화재 1. 보물 제11-8호_강화 동종(복제품) 2. 사적 제133호_강화 고려궁지 3.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5호_강화유수부 동헌 4.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6호_강화유수부 이방청 5. 강화군 보호수 제4-9-63호 _ 회화나무 사적 제133호 _ 강화 고려궁지 (江華 高麗宮址), 외규장각 면 적 : 15,097㎡ 지정일 : 1964.06.10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북문길 42 (관청리) 시 대 : 고려시대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고종 19년(1232)에 강화도로 수도를 옮기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건물이다. 정궁 이외에도 행궁·이궁·가궐을 비롯하여 많은 궁궐이 있었다. 정문은 승평문이었고 양쪽에 삼층루의 문이 두 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

문화재/사적 2022.01.10

고려 23대 고종의 능, 사적 제224호_강화 홍릉

사적 제224호 _ 강화 홍릉 (江華 洪陵) 면 적 : 31,415㎡ 지정일 : 1971.12.28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국화리 산129-2번지 시 대 : 고려 고종 46년(1259) 홍릉은 고려 23대 고종(1192∼1259)의 무덤이다. 이 당시는 정치적으로 최씨 집권시기였으며 밖으로는 거란·몽골의 침입 등으로 고통받았던 시기이다. 고종 18년(1231)부터 여러 차례에 거친 몽골의 침입으로 인해 국토는 초토화되고, 인명과 문화 유산의 손실 또한 매우 컸다. 고종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대장경을 만드는 등 문화상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에 남아있는 『고려대장경』이다. 원래의 홍릉은 높게 쌓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 2단에는 사람형상을 한 조각, ..

문화재/사적 2022.01.07

사적 제4호_가림성

사적 제4호 _ 부여 가림성 (扶餘 加林城) 면 적 : 309,739㎡ 지정일 : 1963.01.21 소재지 : 충남 부여군 임천면 성흥로97번길 167 (군사리) 시 대 : 동성왕 23년(501) 부여 가림성은 백제의 수도였던 웅진성과 사비성을 지키기 위하여 금강 하류 부근에 쌓은 석성(石城)이다. 산 정상에서는 강경읍을 비롯한 금강 하류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며, 백제 동성왕 23년(501)에 위사좌평 백가(苩加)가 쌓았다고 전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을 쌓은 백가는 동성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낸 것에 앙심을 품고 동성왕을 살해하고 난을 일으켰으나 무녕왕이 왕위에 올라 난을 평정하고 백가를 죽였다고 전한다. 높은 관리인 위사좌평으로 하여금 성을 지키도록 하였다는 사실은 이 성의 전략적 중요..

문화재/사적 2021.11.17

사적 제416호_제주 삼양동 유적

사적 제516호 _ 제주 삼양동 유적 (濟州 三陽洞 遺蹟) 면 적 : 18,363㎡ 지정일 : 1999.11.16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선사로2길 13, 외 (삼양일동) 제주 삼양동 유적은 제주시 삼양동 일대의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에 발견된 선사시대 유적이다. 1997년 4월부터 1999년 7월에 걸쳐 제주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청동기-초기철기시대를 전후한 시기의 집터 200여 곳을 비롯하여 돌을 쌓아 만든 담장, 쓰레기를 버리던 폐기장, 마을의 외곽을 두르고 있던 도랑 자리가 있는 큰 규모의 마을 유적이 확인되었다. 집터 내부에서는 토기류(구멍띠토기, 덧띠무늬토기[점토대토기]), 적갈색항아리 등)와 석기류(돌도끼, 대패, 갈돌, 숯돌 등), 철기류(철제도끼, 손칼), 청동..

문화재/사적 2021.10.21

탐라왕국의 발상지, 사적 제134호_제주 삼성혈

한반도에서 가장 오래된 유적, 제주 삼성혈 (濟州 三姓穴) 사적 제134호 _ 제주 삼성혈 (濟州 三姓穴) 수 량 : 33,832㎡ 지정일 : 1964.06.10 소재지 : 제주 제주시 삼성로 22 (이도일동) 시 대 : 선사시대 삼성혈은 제주도의 고씨·양씨·부씨의 시조가 솟아났다는 3개의 구멍을 말한다. 3시조들은 가죽옷을 입고 고기를 사냥해 먹고 살다가, 다섯 곡식의 씨와 송아지·망아지를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와 각각 결혼하여 농경생활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구멍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하나만 바다와 통하고 나머지는 흔적만 남아있다. 조선 중종 21년(1526)에 제사를 지내기 위해 단과 비석을 세우고, 주위에 울타리를 쌓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제주 삼성혈 표지판 제..

문화재/사적 2021.09.26

사적 제251호_여주 파사성

사적 제251호 _ 여주 파사성 (驪州 婆娑城) 면 적 : 64,619㎡ 지정일 : 1977.07.21 소재지 : 경기도 여주시 대신면 천서리 산8-10번지 시 대 : 삼국시대 파사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쌓은 산성으로 둘레는 약 1800m이며 성벽은 비교적 잘 남아 있다. 신라 파사왕(재위 80∼112)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지며, 임진왜란 때 승려 의엄이 승군을 모아 성을 늘려 쌓았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는 남한산성에 대한 비중이 증가하여 파사성에 대한 중요성이 감소하였다. 현재는 동문이 있던 자리와 남문이 있던 터가 남아있다. 이 성은 성의 일부가 한강변에 나와있어 강 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기 때문에 상대를 제압하기 매우 좋은 요새이다. 여주 파사성 표지판 여주 파사성 배치도 파사성 ..

문화재/사적 2021.08.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