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충청남도 109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_문수사 지장시왕탱화및복장유물일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73호 _ 문수사지장시왕탱화및복장유물일괄 (文殊寺地藏十王幀畵및腹藏遺物一括) 수 량 : 탱화1폭,복장유물29점 지정일 : 2003.10.30 소재지 : 충청남도 예산군 수덕사안길 79 (덕산면, 근역성보관) 시 대 : 조선시대(1774) 명주 바탕에 채색으로 그려진 지장시왕탱화 1폭 및 복장발원문을 비롯한 복장유물 29점이다. 복장유물로는 복장발원문 1점, 서신 6점, 책력 14점, 후령통 1점, 오보병 5점, 다라니 2점 등이 있다. 조선후기 충남 서부지역 불교문화의 양상을 잘 보여주는 자료로서 탱화 이외에 다양한 복장유물을 포함하고 있고, 탱화 제작과 관련된 서신이 있다는 점은 아주 특별한 예이다. 불화의 하단부에 있는 화기에는 1774년이라는 조성연대와 조성사찰, 그림을 그린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_공주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및 복장유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2138호 _ 공주 마곡사 영산전 목조칠불좌상 및 복장유물 (公州 麻谷寺 靈山殿木造七佛坐像 및 腹藏遺物) 수 량 : 7구 및 복장유물 지정일 : 2016.03.10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마곡사로 966 (사곡면, 마곡사) 시 대 : 17세기 후반 마곡사 영산전 칠불좌상은 1681년 수화승 단응을 중심으로 계천, 성환, 탁밀 등 20여명의 조각승이 함께 제작한 작품으로 현재 전하는 조선후기 불상 가운데 천불상의 주존불로 제작된 유일한 사례이다. 또한 단응이 수화승으로 독립해서 제작한 불상 중 가장 이른 사례이며, 특히 그의 활동 지역으로 알려진 경상도만이 아니라 충청남도에서도 활동하였음을 알려주는 사례이다. 불상의 특징 가운데 방형의 얼굴이 뚜렷한 이목구비라든가 배 부분에서 W형..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_공북루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_ 공북루 (拱北樓) 수 량 : 1동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165번지 시 대 : 36년(1603) 공산성의 북문으로 강남과 강북을 오가는 남북통로의 길이다. 조선 선조 36년(1603)에 관찰사 유근이 쌍수산성을 고쳐 세우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를 다시 지어 공북루로 고쳐 부르고, 그 옆에 월파당을 지었다고 한다. 현종 4년(1663) 관찰사 오정위가 낡은 것을 다시 지었으며 기록은 송시열이 하였다. 월파당은 효종 5년(1654)에 붕괴되어 현재는 터만 남아있다. 앞면 5칸·옆면 2칸으로 규모가 큰 누각 건축이어서, 윗층에는 누마루를 깔았고 아랫층은 통행로로 쓰고 있다.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고, ‘공북루..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_명국심장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 _ 명국삼장비 (明國三將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69.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10-2번지 시 대 : 32년(1599) 공산성 공북루 아래에 자리한 한채의 비각안에 3기의 비가 나란히 서 있다. 이 비들은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에 주둔해 있으면서 주민들을 왜군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준 명나라 세장수 이공, 임제, 남방위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원래 선조 32년(1599) 금강변에 처음 세웠다가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 때에 다시 세워둔 것이다.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일본인들에 의해 ‘왜구(倭寇)’등의 글자가 훼손되었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아무렇게나 매몰되었던 것 명국삼장비 표지판 명국삼장비 표지석 명국삼장비 명국삼장비 명국삼장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_ 공주 영은사 목조관음보살좌상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_ 공주 영은사 목조관음보살좌상 (公州 靈隱寺 木造觀音菩薩坐像) 수 량 : 1구 지정일 : 2001.06.30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공산성길 59-22 시 대 : 17세기 공주 공산성(사적 제12호) 내의 영은사 원통전에 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으로 1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팔각의 대좌 위에 앉아 있는데 약간 움츠린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극락조(極樂鳥)가 새겨진 목조 보관을 쓰고 있으며, 자애로운 얼굴 표정과 이목구비의 표현이 자연스럽다. 보살상이면서도 불상과 같은 법의(法衣)의 표현과 자세를 취하여 원통전의 주존으로서의 불격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공주 영은사 목조관음보살좌상 2015.07.19. 공주 영은사 원통전 글 문화재청 ▼보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_연평부원군 신도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89호 _ 연평부원군 신도비 (延平府院君 神道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9.12.19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상하만길 17-34 (만수리) 시 대 : 효종1(1650)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놓은 비를 말한다.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이귀(1557∼1633) 선생을 기리고 있다. 이귀는 이이·성혼의 가르침을 받았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군인을 모집하여 나라를 구하는데 힘썼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오르게 하는 인조반정때 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그후 연평부원군에 봉해졌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에 한돌로 이루어진 비몸과 머릿돌을 세웠다. 거북받침돌은 머리를 수평으로 내밀고 있으며, 머릿돌에는 두 마리의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_공주 오룡리 귀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1호 _ 공주 오룡리 귀부 (公州 五龍里 龜趺) 수 량 : 1기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296번지 시 대 : 조선 중기 귀부는 비받침부분을 일컫는 말로, 대개 거북 모양을 띠고 있다. 이 귀부는 조선 제 16대 임금인 인조의 아들 숭선군의 신도비(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가까이에 세우는 비)를 세우기 위해 만든 것이나 비를 세우지 못하고 중단되어 귀부만 남은 것이다. 숭선군은 이름은 징(徵)이고, 인조의 다섯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귀인 조씨(趙氏)이다. 효종 2년(1651) 누이인 효명옹주의 시할아버지 김자점의 역모에 관계되었다 하여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7년(1656)에 석방되어 벼슬과 지위를 되돌려 받았다..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_공주 동원리 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9호 _ 공주 동원리 석탑 (公州 東院里 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신풍면 동원리 380번지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동원리라는 마을 위쪽의 밭에 서 있는 3층 석탑이다. 3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탑 주변은 기와조각이 흩어져 있을 뿐 다른 유물은 없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현재 세번째 탑신은 없어졌다. 1 ·2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올라 갔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전체적으로 기단과 탑신 몸돌에 새긴 기둥조각 등은 정교하나, 1층 몸돌에 비해 2층 몸돌이 급격히 줄어들어 균형을 이루지 못하고, 또한 3층 몸돌을 잃어버려 아쉬운 ..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8호_공주 가척리석탑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98호 _ 공주 가척리 석탑 (公州 加尺里 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82.12.31 소재지 : 충남 공주시 탄천면 청림1길 136 (가척리) 시 대 ; 고려시대 추정 청림사의 절터로 전하는 곳에 이 탑이 서 있다. 석탑은 전체의 무게를 받치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쌓고, 3층의 탑신(塔身)을 올렸는데, 원래는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비교적 작은 크기이며, 각 부분이 일부 깨져 있다. 기단은 아래층과 윗층의 맨윗돌이 탑신에 비해 지나치게 커보여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탑신의 각 지붕돌은 얇고 작으며 밑면에 3단의 받침을 두었다. 낙수면은 느린 경사를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살짝 솟아올라 곡선미를 보여준다. 길고 가는 탑신, 지나치게 넓은 기단 등 균형미는 없..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_남연군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80호 _ 남연군의 묘 (南延君의 墓) 수 량 : 5,590㎡ 지정일 : 1989.12.29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산5-28번지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이구(?∼1822)의 묘이다. 대원군 이하응이 풍수지리설에 따라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말을 듣고 원래 경기도 연천에 있던 남연군의 묘를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이곳에는 가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절을 불태우고 탑을 부순 후 이장했으며, 이장한지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는데 그가 곧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오른 고종이다. 그 후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있었으며, 이 일로 대원군이 서양에 대한 배척을 강화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