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조선왕릉

사적 제200호_고양 서삼릉 (2016.12.25.일요일), 회릉, 예릉, 효릉(비공개)

기리여원 2016. 12. 28. 22:37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


회릉 : 제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를 모신 단릉

효릉 : 제12대 인종과 왕비 인성왕후 박씨를모신 쌍릉

예릉 : 제25대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긴씨를 모신 쌍릉

소경원 : 제16대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의 원

의령원 : 사도세자(뒤에 장조로 추존의맏아들이자 정조의 형인 의소세자의 원

효창원 : 제22대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원

회묘 : 제10대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묘

태실 : 일제 강점기에 전국에 흩어져 있던 조선 왕실의 태실을 모아 놓은 곳


예릉

 

사적 제200호 _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    

 

면   적 : 1,361,665㎡

지정일 : 1970.05.26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삼릉길 233-126 (원당동, 서삼릉)

시   대 : 조선시대

 

서삼릉(西三陵)은 희릉(禧陵), 효릉(孝陵), 예릉(睿陵)의 3기의 능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종 계비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이 처음 들어선 이후 인종과 인종비 인성왕후의 무덤 효릉, 철종과 철종비 철인왕후의 무덤인 예릉이 들어서면서 서삼릉이란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서삼릉에는 3기의 왕릉 이외에도 3기의 원과 1묘(회묘),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54기가 자리 잡고 있다. 1645년(인조 23) 소현세자가 죽자 소현세자를 이곳에 안장하고 소현묘(昭顯廟)라고 칭하였으나 1870년(고종 7)에는 소경원(昭慶園)으로 개호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왕실의 태실, 왕자묘, 후궁묘, 공·옹주묘가 현재의 위치로 집결되었으며, 해방 이후에 명종 후궁 경빈 이씨의 묘 외 6기의 묘를 옮겨왔다. 1944년에는 정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묘인 효창원(孝昌園)이, 1949년에는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의 묘 의령원(懿寧園)이 이곳으로 옮겨왔으며, 1969년에는 성종 폐비 윤씨의 회묘(懷墓)가 서삼릉으로 옮겨왔다.

서삼릉 능역에는 의친왕과 의친왕의 모친 귀인 장씨의 묘도 있었으나 1996년 의친왕묘가, 2009년에 귀인 장씨(의친왕의 모친)의 묘가 서삼릉에서 홍유릉 경역으로 천장하여 서삼릉은 현재의 3릉 3원 1묘 및 왕자·공주·후궁 등의 묘 46기, 태실 54기의 구성을 이루게 되었다.

※ 고양 서삼릉 내에 위치한 인종 효릉과 소현세자의 소경원, 폐비 윤씨의 회묘를 비롯한 경선군·경완군묘, 경혜옹주묘, 태실, 왕자·왕녀·후궁묘역은 사적지 원형 보존과 훼손 방지를 위하여 비공개로 관리중입니다. 학술조사 등 목적으로 관람을 희망하실 경우에는 사전에 서부지구관리소 서삼릉(031-962-6009)에서 허가를 받은 후 출입 가능합니다.

 

 

 

 

사적 제200호 _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 표지판            

 

 

 

 

 

 

 

 

고양 서삼릉 (高陽 西三陵) 종합 안내도            

 

 

 

 

 

 

 

 

서삼릉(西三陵)


서삼릉은 도심 서쪽에 있는 세 개의 능을 의미하는 것으로 조선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의 희릉, 재12대 인종(재위1544`1545)과 인성왕후의 효릉, 제25대 철종(재위1849~1863)과 철인왕후의 예릉이 있다. 주변에는 대군, 공주 들의 묘49기와 태실 54기가 있다.

 

 

 

 

 

 

 

 

 

 

 

 

 

 

 

 

 

 

효창원(문효세자)

 

 

의령원(의소세손)


의령원(懿寧圓)

 

조선 영조(英朝)의 아들 장조(莊祖, 사도세자 思悼世子)의 의 제1자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소이다. 의소세손(1750~1752)은 이름은 정(琔)이며, 3세의 어린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서대문구 북아현동(중앙여고 내)에 있었으나 1949년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비문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御筆)이다

 

효창원(문효세자)


효창원(孝昌圓)


    조선 정조(正祖)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 묘소이다. 문효세자(1782~1786)는 의빈(宜嬪) 성씨의 소생으로, 1872년(정조 6년)에 태어나 5세의 어린나이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처음에는 용산구 청파동 효창공원에 있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44년에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예릉


   조선 제25대 왕이며, 황제로 추존된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와 그의 후(后) 철인장황후(哲仁章皇后) 김씨의 능이다.

   철종장황제(1831~1863, 재위:1849~1863) 장조(莊祖, 사도세자 思悼世子)의 증손자이며,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아들이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승하하자 대왕대비(大王大妃, 순원숙왕후 純元肅皇后)에 의하여 강화도로부터 영입되어 창덕궁(昌德宮) 인정전(仁政殿)에서 즉위하였다.

   재위 14년 동안 처음 3년간은 대왕대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였고, 그 뒤로 안동김씨의 세도로 인하여 국정을 바로잡지 못하고, 1863년에 창덕궁 대조전(大造殿)에서 승하하였다.

  묘호는 철종(哲宗)이었고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융희 1년)에 황제로 추존되었다.


   철인장황후(1837~1878)는 영은부원근(永恩府院君) 김문근(金汶根)의 딸로 대왕대비에 의해 1851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858년에 원자를 낳았으나 곧 죽었다.

  1878년(고종 15년)에 창경궁(昌慶宮) 양화당(養和堂)에서 승하하여, 묘호는 철인왕후(哲人王后)였고, 대한제국 시절인 1908년(융희 1년)에 왕후로 추존되었다.


   능제는 봉분을 병풍석(屛風石) 없이 난간석(欄干石)으로만 연결한 쌍릉(雙陵)이다.

봉분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베치되고 그 주위에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홍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陵寢)의 강(언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紅살文) 등이 있다.


* 예릉 연혁

  - 1864년(고종 1) 철종 안장. 예릉조성

  _ 1878년(고종 15) 철인왕후 안장, 쌍릉으로 조성


* 예릉 제향일

 - 매년 5월23일(양력)

 

 

 

 

 

 

 

예릉 정자각

 

 

예릉 정자각

 

 

예릉 정자각

 

 

 

 

 

 

 

 

 

 

 

예릉 비각

 

 

 

 

 

예릉

 

 

 

 

 

 

 

 

 

 

 

 



희릉(禧陵)


    조선 제11대 중종(中宗)의 제1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이다.

    장경왕후(1491~1515)는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1506년에 중종의 후궁인 숙의(淑儀)로 책봉되었으나, 정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가 폐위되자 1507년에 왕비로 책봉되었다. 1515년에 세자인 인종(仁宗)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인하여 경복궁(景福宮) 별전(別殿)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봉분에 병풍석(屛風石)이 없고 난간석(欄干石)만 두른 단릉(單陵)으로 조선 전기의 능제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봉분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배치되고 그 주위에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陵寢)의 강(언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紅살門) 등이 있다.

 

*  희릉 영혁

   - 1537년(중종 32) 헌릉(태종의 능)서쪽 언덕에서 지금의 자리로 천장


*  희릉 제향일

   - 매년 3월 26일(양력)

 

 

 

 

희릉 정자각

 

 

희릉 정자각

 

 

 

 

 

 

 

 

 

 

 

 

 

 

 

 

 

 

 

 

 

 

 

 

 

 

 

 

비공개지역

- 효릉, 소경원, 회묘, 태실, 왕자공주묘, 후궁묘


효릉(孝陵)_비공개

   조선 제12대 인종(人宗)과 그의 비 인성왕후(人聖王后) 박씨의 능이다.

   

    인종(1515~1545, 재위:1544~1545)은 중종의 맏아들로 1520년에 세자로 책봉되었고, 1544년에 창경궁(昌慶宮) 명정전(明政殿)에서 즉위하였다. 그러나 재위 9개월 만에 경복궁(景福宮) 소침(小寢0에서 승하하였다.

   생모 장경왕후(章敬王后)가 7일만에 승하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 윤씨의 손에서 자랐으며,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도 깊으며 또한 형제간의 우애도 돈독하였다고 한다. 소생이 없어 이복동생인 명종(明宗)이 대를 이었다.


     인성왕후(1514~1577)는 금성부원군(錦城府院君) 박용(朴墉)이다. 1524년에 세자빈에 책봉되고 인종 즉위와 더불어 왕비가 되었다. 1577년(선조 10년)에 경복궁(景福宮)에서 승하하였다.


   능제는 난간석(欄刊石)으로 두 봉분을 연결한 쌍릉(雙陵)이다. 인종의 봉분에는 병풍석(屛風石)이 둘러져 있으나 인성왕후 봉분에는 병풍석이 생략되어 있다. 봉분 주변에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배치되고 그 주위에 곡장이 둘러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錫), 무인석(武人石),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능침(陵寢)의 강(언덕) 아래에는 정자각(丁字閣), 비각(碑閣), 홍살문(紅살文)등이 있다.



* 효릉 연혁

  - 1545년(명종 즉위년) 인종 안장, 효릉 조성

  - 1578년(선조 11) 인성왕후 안장,  쌍릉으로 조성


* 효릉 제향일

  - 매년 9월 마지막 주 수요일(양력)

 

출처  문화재청,카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