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경기도

경기도 기념물 제87호_강희맹선생묘 및 신도비

기리여원 2023. 1. 22. 14:14

경기도 기념물 제97호 _ 강희맹선생묘및신도비 (姜希孟先生墓및神道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85.09.20

소재지 : 경기 시흥시 하상동 2번지

 

조선 초기 성종대의 뛰어난 학자이며 우리나라 최초의 농학자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선생의 묘이다.

 

세종 29년(1447) 24세로 장원급제한 뒤 여러 관직을 거쳐 세조 9년(1463) 중추원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세조의 총애를 받아 세자빈객이 되었다. 예종 즉위년(1468)에 진산군(晉山君)에 봉해졌으며, 성종 13년(1482)에 좌찬성에 이르렀다. 문장이 당대 으뜸이고 글과 그림에도 뛰어났으며, 인품이 겸손하고 치밀해 맡은 일을 잘 처리하였다. 신숙주(申叔舟) 등과 함께 『세조실록』, 『예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경국대전』, 『동문선』, 『동국여지승람』, 『국조오례의』 등에도 참여하였다. 저서로는 『금양잡록』, 『사숙재집』, 『존담해이』 등이 있다. 또한, 소나무와 대나무 및 산수화를 특히 잘 그렸는데, 현재 일본에 소장되어 있는「독조도(獨釣圖)」가 강희맹의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묘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묘역의 중앙에 위치해 있고,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이며 봉분 앞에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그 좌우에 독특한 모습의 문인석이 있다. 묘역 왼쪽 아래에는 성종 19년(1488)에 세운 신도비(神道碑: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우던 비)가 있는데,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홍문관박사 박증영(朴增榮)이 ‘문량공신도비(文良公神道碑)’라는 전액(篆額, 전서체로 쓴 비신 상단부의 명칭)과 글씨를 썼다.

 

강희맹선생 묘 및 신도비 표지판

 

 

강희맹선생 묘 및 신도비 표지석

 

 

진주갈씨문량공휘희맹 재사(晉州姜氏文良公諱希孟 齎祠) 전경

 

 

재실인 연성재(蓮城齋)

 

 

강희맹의 사당인 문량공사우(文良公祠宇)

 

 

강희맹선생 신도비각 (姜希孟先生墓및神道碑閣)

 

 

강희맹선생 신도비(神道碑)

 

신도비(神道碑)는 성종 19년(1488년)에 건립되었으며 비각(碑閣)은 1988년에서 경기도에서 세웠으며 신도비의 규모는 비신(碑身)의 높이는 1.92m 폭 80cm 두께 20cm로 대제학(大提學) 서거정(徐居正)이 비문을 짓고 홍문관박사 박증영(朴增榮)이서(書)와 전(篆)을 하였다.

 

강희맹선생묘

 

문량공(文良公) 강희맹(姜希孟, 1424∼1483)

 

조선의 문신, 문장가. 본관은 진주. 자는 경순, 호는 사숙재(私淑齋무위자(無爲子),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지돈녕부사 석덕(碩德)의 아들로, 희안(希顔)의 동생이다.

1447(세종 29) 18세에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했고, 1453(단종 1) 예조정랑이 되었다. 1455(세조 1) 원종공신 2등에 책봉되었고, 예조참의·이조참의를 거쳐 1463년 진헌부사가 되어 명나라를 다녀왔다. 1473년 병조판서가 되고, 이어 판중추부사·이조참판·판돈녕부사·우찬성을 거쳐 1482년 좌찬성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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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맹선생과 부인 안씨와의 합장묘

 

강희맹 묘소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가 있으며 한 단 아래 좌우에  문신석인(文臣石人) 한쌍이 서있다

 

강희맹선생묘의 혼유석, 상석, 향로석

 

 

강희맹선생묘 묘비

 

 

강희맹선생묘의 문신석인 1쌍

 

2023.01. 21. 경기 시흥시 하상동, 강희맹선생 묘소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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