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경기도

경기도 기념물 제56호_ 이대원장군묘 및 신도비

기리여원 2023. 1. 22. 05:55

경기도 기념물 제56호 _ 이대원장군묘및신도비 (李大源將君墓및神道碑)

 

수   량 : 일원5,643㎡

지정일 : 1980.06.02

소재지 : 경기 평택시 포승읍 희곡리 산83-6번지 

 

조선 중기의 무신 이대원(李大源, 1556∼1587) 장군의 묘이다. 1587년(선조 20)에 남해안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는 데에 큰 공을 세웠다. 이후 왜구가 다시 흥양에 침입하자 출병하여 손죽도 해상에서 적과 싸우다 전사하였다.

 

묘역은 그의 부인인 경주 김씨(慶州金氏)·용인 이씨(龍仁李氏)와 함께 매장된 삼분(三墳 ; 봉분이 3개인 무덤)의 형태이다. 그 중 장군의 봉분은 중앙에 있는데,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옷으로 대신하였다고 전한다. 묘표(墓表; 무덤 주인공의 이름 등을 새긴 비석)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 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이며,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묘역 입구에는 1699년(숙종 25)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 ;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석)를 세웠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 비석의 이름을 전서체로 새긴 부분)은 김진규가 쓴 것이다. 신도비는 보편적인 옥개방부형(屋蓋方趺形; 지붕모양의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의 모습이지만, 규모가 장대하고 이색적인 문양의 받침돌이 독특하다.

 

이 묘역은 17세기 석물의 예술성 및 경기 지역 능묘 문화의 특성을 보이는 가치 높은 문화재이다.

 

이대원장군묘및신도비 표지판

 

 

 이대원장군묘 표지석

 

 

 이대원장군묘 입구

 

 

이대원장군묘 및 신도비 전경

 

 

확충사(䨥忠祠) 홍살문

 

 

충렬공 이대원장군 약사(忠烈公 李大源將軍 略史) 표지판

 

 

재실인 충렬재(忠烈齋)

 

 

이대원장군 신도비각 (李大源將君墓神道碑閣)

 

 

이대원장군 신도비

 

묘역 입구에는 1699년(숙종 25)에 건립한 신도비(神道碑 ;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 근처 길가에 세운 비석)를 세웠다. 비문은 남구만이 짓고 조상우가 글씨를 썼으며, 전액(篆額; 비석의 이름을 전서체로 새긴 부분)은 김진규가 쓴 것이다. 신도비는 보편적인 옥개방부형(屋蓋方趺形; 지붕모양의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의 모습이지만, 규모가 장대하고 이색적인 문양의 받침돌이 독특하다.

 

이대원장군 신도비

 

 

이대원장군 동상(李大源將軍 銅像)

 

충렬공 약사(忠烈公 略史)

 

출생지 : 평택시 포슴면 네기리(정문동)

        자 : 호연(浩然)      본관(咸平)

문화재지정 : 경기도 긴념물 제 56호 신도비(확충사)

                   : 평택시 포승면 희곡리 산 83-6 : 초혼묘(招魂墓), 초혼묘란 (招魂墓) 말그대로 넋을 부르는 묘란 뜻

충열사 : 여수시 삼산면 손죽리 산 1552 : 분 묘(墳 墓)

쌍충사 : 전남 고흥군 도양읍 녹도 기념물 제128호

영    당 : 전남 여수시 국동 어항단지내

 

중요행적 : 1566년 출생, 1583년 선조 16년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1586년 선전관(宣傳官)으로 있다가 같은 해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젊은 나이 21세에  녹도만호(鹿島萬戶)가 되었다. 1587년 公은 전라좌도(全羅左道)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로 임명되었으나 교지(敎旨)도 받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22세 나이에 전사당하였으며 사후 병조판서(兵曺判書)에 추증되었음.

 

전적사 : 장군의 전공으로는 임진왜란 5년전 1587년 남해안 손죽도(巽竹島) 앞바다에 자주 침입한 왜구(倭寇)들을 섬멸시

키고 대승하였으며 왜장을 사로잡아 수사(水使) 심암(沈巖)에게 압송하였다. 그러나 전공을 자기것으로 하려는 암(沈巖)의 부탁을 거절하자 미움과 감정을 가지고 계획적으로 패전 전멸케 하도록 만들었다. 1587년 첫침입때 패전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왜구들이 더 많은 전선을 이끌고 재침하여 오니 장군(將軍)은 전비를 갖추어 출전하려 하였으나 해는 저물어 가는데 수사 심암(沈巖)은 충원군도 지원해 주지 않고 억지로 출전 명령을 내려 나아가 3일간 싸우다가 장렬이 전사하였다. 이를 지켜 보았던 백성들은 분노하여 장군(將軍)을 전사하도록 한 것은  수사(水使) 심암(沈巖)이란 것을 알고 조정에 상소를 올렸다. 도원사 신립(都元師 申砬)과 감사 홍여순(監司 洪汝淳)이 심암(沈巖)의 실상을 낱낱이 조사하여 선조(宣祖)에게 장계를 올려 심암(沈巖)을 한양으로 압송하여 효수형에 처하였디. 이로 인하여 장군의 전적사가 더욱 더 빛나게 된 것이다. 이순신장군은 대원장군(大源將軍)을 잃은 것은 국가에 큰 손실이라하여 손(損)자와  대장군(大源將軍)의 대(大)자를 붙여 손대도(損大島)라 명명하여 수백년 동안 전하여 오던 지명을 경술(1910년) 국치이후 일제에 의하여 장군의 충절정신을 말살코져 지금의 손죽도(巽竹島)로 개칭되었으니 참으로 애석 하고 송구스러운 일이다. 따라서 앞으로 이 지명은 손대도(損大島)로 환원되어야 할 명제로 남아 있다. 촌각을 다투는 격전의 현장에서 무수한 생명의 위협을 눈앞에 두고도 피로서 길이길이 청사에 빛나는 28자의 옥음을 남겼으니 용광로보다 뜨거운 정열과 낙낙장송보다 더 의로운 기개로 충효의(忠孝義)의 사표가 되 보일 듯 선합니다. 여기에 훌륭하신 구국충신(求忠臣) 장군(將軍)의 동상(銅像)을 우뚝높게 모시게 되었다. 위대한 장군의 충절의 성지(聖地)가 되어 역사 교육의 도으로 영히 보전되어야 할 것이다.

 

절명시(絶命詩)

 

日暮轅門渡海來 (일모원문도해래)      兵孤勢乏此生哀  (병고세핍차생애) 

君親恩義俱無報 (군친은의구무보)       恨入愁雲結不開  (한입수운결불개) 

 

진중에 해 저무는 데 바다 건너와 

병사는 외롭고 힘은 다하여 이내 삶이 서글프다.

임금과 어버이 은혜 모두 갚지 못하니

한 맺힌 저 구름도 흩어질줄 모르네.

 

왜구들과의 혈전 중 애타게 기다렸던 지원군이 끝내 오지 않게 됨을 안 후, 자신의 속적삼에 혈서로 썼다는 절명시(絶命詩)는 읽는 사람에게 애절한 마음을 느끼게 해준다. 기대하였던 지원군이 오지 않는 데 따른 절망(絶望)이 흠뻑 배어있고, 임금과 부모에 대한 충정이 깊이 어려 있는 시이다.

 

 

 

▼확충사입니다.

 

확충사(䨥忠祠) 전경

 

 

확충사 솟을 문 상부에 걸려있는 충렬공사우(忠烈公祠宇) 현판

 

 

이대원장군의 사당인 확충사(䨥忠祠)

 

 

▼이대원장군 묘소입니다.

 

이대원장군묘(李大源將君墓)

 

묘역은 그의 부인인 경주 김씨(慶州金氏)·용인 이씨(龍仁李氏)와 함께 매장된 삼분(三墳 ; 봉분이 3개인 무덤)의 형태이다. 그 중 장군의 봉분은 중앙에 있는데, 전란중에 시체를 수습할 수 없어 죽기 전에 하인에게 남겨 전해온 속적삼으로 가묘를 조성했다고 한다

 

이대원장군묘

 

이대원장군묘소의 석조물은 혼유석, 상석, 향로석, 묘비, 망주석 한쌍이 위치해 있다.

 

이대원장군묘

 

 

이대원장군묘표

 

묘표(墓表; 무덤 주인공의 이름 등을 새긴 비석)는 원수방부형(圓首方趺形; 둥근 머릿돌과 사각 받침돌의 비석 형태)이며, 후대에 세워진 것이다

 

묘표에는 '贈嘉善大夫兵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行折衝將軍全羅左道水軍節度使李公之墓 貞夫人慶州金氏 貞夫人龍仁李氏  祔左(증가선대부병조참판겸동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부총관행절충장군전라좌도수군절도사이공지묘 정부인경주김씨 정부인용인이씨 부좌)'라고 쓰여져 있다.

충마총(忠馬塚)

 

 

▼이대원장군을 모시고 있는 여수 영당지입니다.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4호 _ 여수 영당지 (麗水 影堂址)

 

소재지 : 여수시 어항단지로 222-32(남산동)

 

여수 영당은 최영, 이순신, 이대원, 정운 장군과 용왕신, 산신 등을 모시고 있는 제당으로 여수의 읍지와 향토지, 각종 역사지리서, 토지대장 등을 통해 영당의 역사성과 장소성을 살펴볼 수 있다.

영당에서는 매년 춘추로 제전이 펼쳐졌고, 영당 앞을 지나는 배들은 고사미를 내고 고사를 지낸 후에 출어하는 풍속 등 민속신앙의 현장으로서 민속적 의미가 있고, 여수 영당은 여수지역의 역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제당으로 복원된 건물 자체의 가치는 높지 않기 때문에 영당의 역사적 의미와 장소성의 의미를 살려 영당지(影堂址)로 지정하여 보존할 필요성이 있다.

 

2023.01.19, 이대원장군묘 및 신도비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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