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충청남도 59

충청남도 기념물 제165호_홍성 결성읍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165호 _ 홍성 결성읍성 (洪城結城邑城) 면 적 : 11,913㎡ 지정일 : 2004.04.10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산28-2번지 시 대 : 1451년 완축 홍성군 결성면 소재 결성읍성은 치소(治所)를 석당산성(石堂山城)으로 옮긴 후 51년만인 1451년에 완축(完築)하였고 『세종실록지리지』와『신동국여지승람』, 『충청도읍지』, 『여지도서』 등에 기록이 전하고 있다. 규모는 성 주위 약 1,007m(3,325척)이며, 성벽높이 내측 약 2∼3m, 외측 약 3∼6m이고, 성벽 기저부 폭 약 4.5m이다. 성을 개축하면서 구간마다 도내 각읍(各邑)이 나누어 쌓은 것을 표시한 아산 지역의 기각역축(記刻役築) 기록이 북쪽 성벽에 남아 있다. 읍성 내에는 17개의 관아건물이 있..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_김좌진장군생가지, 사당, 백야기념관

충청남도 기념물 제76호 _ 김좌진장군생가지 (金佐鎭將軍生家地) 면 적 : 1,205㎡ 지정일 : 1989.12.29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갈산면 백야로546번길 12, 외 (행산리) 시 대 : 구한말 백야 김좌진(1889∼1930) 장군이 살았던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대한제국 후기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청년학우회 등의 간부를 지냈고, 1913년에 대한제국 광복단에 가입하여 자금을 모으다가 체포되어 3년간 복역한 후 1917년 만주로 망명하였는데, 이후 13년간 평생을 항일전투에 몸바쳤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에서 일본군을 섬멸하였는데 이것이 독립 전투상 승리의 금자탑을 세운 일로 기록되는 청산리전투이다. 1929년 정신, 이붕해 등과 함께 한족..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_한용운선생생가지, 만해 문학 체험관, 심우장

충청남도 기념물 제75호 _ 한용운선생 생가지 (韓龍雲先生 生家地) 면 적 : 484㎡ 지정일 : 1989.12.29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만해로318번길 83 (성곡리) 승려이며 시인인 한용운(1879∼1944)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선생은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독립운동가로도 활동했으며 호는 만해(萬海)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분으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체포되어 3년형을 받았다. 일제에 대항하는 단체였던 신간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하였는데, 이 신간회는 후에 학생 의거와 전국적인 민족 운동으로 전개되고 추진되었다. 저서로 『님의침묵』, 『불교대전』 등을 남겼으며 그의 사후인 1962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 쪽에 자리잡고..

충청남도 기념물 제135호_홍주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5호 _ 홍주향교 (洪州鄕校) 면 적 : 4,195㎡ 지정일 : 1997.12.17 소재지 : 충남 홍성군 홍성읍 충서로1575번길 93 (대교리)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홍주향교를 처음 지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고려말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태종 8년(1408)과 태종 18년(1418)에 수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몇 차례의 소실로 1924년에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배치는 앞쪽에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뒤쪽에 제사지내는 공간인 대성전이 있어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이며,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과 우리나라 성..

충청남도 기념물 제134호_결성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4호 _ 결성향교 (結城鄕校) 면 적 : 2,644㎡ 지정일 : 1997.12.23 소재지 : 충남 홍성군 결성면 홍남서로707번길 21-8 (읍내리) 향교는 공자 등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결성향교의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고려 현종 1년(1010)에 세웠다고 전한다. 조선 인조 1년(1623)과 현종 15년(1674), 순조 8년(1808)에 수리하였고 1923년에 크게 보수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건물 배치는 외삼문 없이 바로 교육 공간인 명륜당이 있고, 그 뒤에 제사 공간인 대성전이 있는 전학후묘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대성전은 앞면 3칸·옆면 3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충청남도 기념물 제171호 _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71호 _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 수 량 : 2주(476㎡) 지정일 : 2005.10.31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아문길 27 (홍성읍, 홍성군청) 시 대 : 고려시대 홍성 오관리 느티나무는 고려조의 공민왕이 식재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고을에 액운(厄運)이 낄 것 같으면 느티나무가 밤을 세워 울었으며 이 때마다 서둘러 예방을 하였다고 한다. 역대 목민관들이 홍주에 부임하게 되면 제일먼저 이 나무아래에 제물을 차려놓고 군민의 무고와 평안을 기원하는 제를 올렸다 하며 현재에도 제물을 차려놓았던 기대가 남아있다. ∘ 수 고 : 17.0m (수형-원정형) ∘ 수 고 : 11.5m (수형-원정형) ∘ 흉고둘레 : 6.6m (직경 2.1m) ∘ 흉고둘레 : 5.22m (직경 1.66m)..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_이건창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9호 _ 이건창 묘 (李建昌 墓) 수량/면적 : 1기 / 241.5㎡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건평리 665-27번지 시 대 : 1898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대문장가였던 영재 이건창(1852∼1898)의 묘소이다. 묘는 단분(單墳)이며 특별한 장식이나 석조물이 없다. 이건창은 어렸을 때부터 강화학파의 학맥을 계승한 이시원으로부터 양명학을 바탕으로 한 충의(忠義)와 문학(文學)을 배웠다. 5살 때 문장을 구사할 만큼 재주가 뛰어나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고종 4년(1866) 15세의 어린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고종 11년(1874)에는 사신을 수행하여 기록을 맡았던 서장관에 발탁되어 크게 이름을 떨쳤다. 그 후 고종 12년(1875)..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_ 공주 공산성 연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42호 _ 공주 공산성 연지 (公州 公山城 蓮池) 면 적 : 1,164㎡ 지정일 : 1982.12.31 소재지 : 충남 공주시 금성동 58번지 공산성 안에 있는 연못 중 하나이다. 전체적인 모습은 석축을 단이 지게 정연하게 쌓아 동서로 최대 길이 21m, 너비 12m 정도로 위를 넓게 하고, 아래는 최대 길이 9m, 너비 4m로 좁혀 쌓아 석탑을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을 하고있다. 서남 방향에는 잘 다듬은 돌 2매씩을 길게 쌓아 10여 개의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할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하였다. 바닥에는 판판한 돌을 깔았고, 동·서벽쪽에는 너비 40㎝의 배수로를 설치하여 물의 흐름을 쉽게 하였다. 이 연못은 백제 때부터 계속하여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연못에 이를 수 있는 암..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_숭선군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6호 _ 숭선군 묘 (崇善君 墓) 면 적 : 3,300㎡ 지정일 : 1976.01.08 소재지 : 충남 공주시 이인면 오룡리 산2-1번지 조선 16대 임금인 인조의 다섯째 아들 숭선군의 묘소이다. 군의 이름은 징(徵)이며, 시호는 효경(孝敬)이다. 인조 2년(1624) 이괄(李适)의 난으로 인조를 따라 공주(公州)로 잠시 피신한 일이 있었는데, 궁으로 돌아와서도 항상 공주를 그리워하더니 숙종 16년(1690) 세상을 떠날 때 공주에 묻어 줄 것을 유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왕족의 무덤은 도성(都城)에서 90리 밖으로 나갈 수 없다는 법 때문에 중단되었고 그 후 후손에 의해 다시 이곳으로 옮겨져 만들어졌다. 묘 주위에는 ㄷ자형으로 담장을 쌓았으며, 묘 앞에는 묘비와 장명등(長明燈:무..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_예산 가야사지

충청남도 기념물 제150호 _ 예산 가야사지 (禮山 伽倻寺址) 면 적 : 9,230㎡ 지정일 : 1998.12.24 소재지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상가리 107-31번지 22필 가야사지는 예산군과 서산시 경계에 있는 가야산(伽倻山) 석문봉의 동쪽 아래 넓게 형성된 골짜기에 있는 절터이다. 이곳은 가야동이라고 불리는데 99개의 암자가 있었으며 절터의 중심지라고 전해지는 곳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아버지인 남연군묘(南延君墓)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 대부분 개간되어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어 사지의 가람을 추정할 만한 유구(遺構)는 이미 파괴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가야동 계곡의 논과 밭에 흩어져 있는 기와조각과 석재, 자기조각으로 보아 넓은 골짜기에 걸쳐 거대한 규모로 사찰이 조영되었던 것으로 짐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