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경기도

경기도 기념물 제163호_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

기리여원 2023. 3. 20. 14:58

경기도 기념물 제163호 _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 (淸州韓氏文翼公派墓域)

 

수량/면적 : 일원

지정일 : 1997.05.16

소재지 : 경기 시흥시 거모동 산62번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인조의 장인인 한준겸(韓浚謙, 1557∼1627) 선생과 후손들의 가족 묘역이다.

 

묘역은 한준겸 묘를 중심으로 좌측에 아들 한회일(韓會一) 묘역과 우측에 손자 한이성(韓以成) 묘역, 그리고 앞쪽에 증손 한두상(韓斗相) 묘역이 4대에 걸쳐 조성되어 있다. 한준겸 묘역은 부인 황씨(黃氏)와 합장한 단분(單墳 ; 하나의 봉분)의 형태이다. 17세기 전반기의 묘제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묘표에서부터 동자석인과 장명등까지 골고루 갖춘 표준이 되는 묘역이다. 묘표는 1628년(인조 5)에 제작한 것으로 대리석 재질의 정갈한 비석이다. 동자석인 머리는 쌍계형(雙髻形 ; 두 개의 상투머리가 위로 솟은 형태)으로 묶고 장식이 화려하다. 특히 몸을 봉분쪽을 향해 약간 틀었는데, 마주보는 동자석인과 대칭이 되도록 방향을 틀어서 독특한 조각상이 되었다. 장명등은 머릿돌은 새로 조성하였으나, 몸돌은 옛 장명등의 양식이다.

 

신도비는 1629년(인조 6)에 조성한 것으로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오준이 글을 썼다. 웅장한 이수귀부형(螭首龜趺形 : 용문양을 장식한 머릿돌과 거북모양 받침돌의 비석 형태)이고, 머릿돌과 몸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장대한 거북 받침돌에 안정감 있는 비례감각, 푸른 빛이 감도는 대리석 재질과 생동감 넘치는 뛰어난 조각 솜씨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 가족 묘역은 17세기 묘제의 표준이 되는 곳이고, 묘제 석물의 구성이 다양하며, 동자석인 및 신도비의 조각은 예술성이 높아 가치가 뛰어난 문화재이다.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 표지판

 

 

西平府院君文翼公韓浚謙先生墓域(서평부원군문익공한준겸선생묘역) 표지석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 전경

 

 

한준겸선생 신도비각

 

 

西平府院君文翼公神道碑移遷沿革文(서평부원군문익공신도비이천연혁문)

 

신도비의 위치는 본래 청주 한씨 묘역에서 동남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었다. 1994년 영동고속도로 건설과 군자요금소 설치로 인해 현 위치로 세우고, 신도비의 보호를 위하여 전통 양식을 도입한 비각을 세웠다.

 

한준겸선생 신도비

 

신도비는 1629년(인조 6)에 조성한 것으로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오준이 글을 썼다. 웅장한 이수귀부형(螭首龜趺形 : 용문양을 장식한 머릿돌과 거북모양 받침돌의 비석 형태)이고, 머릿돌과 몸돌은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한준겸선생의 묘

 

문익공(文翼公) 한준겸(韓浚謙, 1557 ~ 1627년)

 

한준겸(韓浚謙, 1557~ 1627)은 조선의 문신이다. 자는 익지(益之), 호는 유천(柳川),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인조의 왕비인 인열왕후의 아버지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며 당파는 서인(西人)에 속했다.

 

선조 때 1586년 문과에 급제하여 검열, 주서, 봉교, 전적을 지냈다. 금천 현감으로 있을 때 정여립의 난이 일어나자, 정여립의 사위 이진길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수감되었다. 호당(湖堂)에 선발되고 1592년 예조정랑이 되었다가 임진왜란 중에 강원도사, 사서, 원주목사, 지평, 필선, 필선, 정언, 교리, 검상, 사인, 부응교, 사간, 집의 등을 거쳐 1597년 정유재란 때 좌부승지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제독 마귀를 도와 말먹이와 식량 등을 보급하였다.

 

그 후 경기감사, 대사성, 경상감사, 병조참판, 전라감사, 부제학을 거쳐, 1605년 호조판서가 되었다. 선조가 죽을 때 한준겸을 비롯하여 일곱 신하들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하였는데, 광해군 때 영창대군이 반역죄로 몰려 죽게 되자 한준겸도 1617년 충주에 유배되었다. 그 후 다시 벼슬에 올라 16215도 도원수가 되어 국경 지방을 수비하는 데 힘썼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사위인 인조가 즉위하자 영돈녕부사가 되었으며 서평부원군(西平府院君)에 봉해졌다.

 

황성의 딸 회산부부인 황씨와의 사이에서 인열왕후를 포함한 24녀를, 첩실에게서 2녀를 두었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가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둘째 딸인 여이징의 처 한씨, 셋째 딸인 정백창의 처 한씨와, 서녀인 여섯째 딸 진원군 이세완의 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위키백과 -

 

한준겸선생(韓浚謙先生)의 묘

 

 

한준겸선생(韓浚謙先生)의 묘비

 

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兼知春秋館事五衛都摠府都摠館西平府院君 贈諡文翼公之墓 檜山夫人黃氏祔左

(보국숭록대부영돈녕부사겸지춘추관사오위도총부도총관서평부원군 증시문익한공지묘 회산부부인황씨부좌)

 

한준겸선생 묘 앞 문인석 1쌍

 

 

한준겸의 아들 한회일(韓會一, 1589~1642)) 의 묘

 

 

한준겸의 아들 한회일(韓會一) 의 묘비

 

嘉善大夫漢城府左尹兼五衛都摠府副摠官韓公之墓 貞夫仁全州李氏袝左 (가선대부한성부좌윤겸오위도총부부총관한공지묘 정부인전주이씨부좌)

 

한준겸의 손자 한이성(韓以成, 1602~1634)의 묘

 

 

한준겸선생의 묘 아래 증손 한두상(韓斗相, 1627~1687)의 묘

 

 

한준겸의 증손 한두상(韓斗相)의 묘비

 

通訓大夫敦寧府判官韓公之墓  淑人楊州趙氏祔左 (통훈대부행돈령부판관한공지묘 숙인양주조씨부좌)

 

청주한씨문익공파 후손의 묘역

 

2023.01.23, 경기 시흥시 거모동, 청주한씨문익공파묘역

글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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