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물/인천광역시 35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_정제두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56호 _ 정제두 묘 (鄭齊斗 墓) 면 적 : 694㎡ 지정일 : 2007.02.2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남로769번길 52 (양도면) 조선 후기 학자이자 강화학의 태두인 정제두(1649~1736)의 묘이다. 정제두의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사앙(士仰), 호는 하곡(霞谷)이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정몽주의 후손으로 우의정 유성(維城)의 손자이고, 진사 상징(尙徵)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한산 이 씨로 호조판서 기조(基祚)의 딸이다. 1649년(효종1년) 한양에서 출생하였다. 1668년(현종 9) 별시문과 초시에 급제했다. 1680년(숙종 6) 영의정 김수항(金壽恒)의 천거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가 되나 사퇴하였고, 1684년 공조좌랑(工曹佐郞)을 잠시 지낸 뒤 다..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_이규보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15호 _ 이규보 묘 (李奎報 墓) 수량/면적 : 1기 / 668.9㎡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까치골길 72-17 (길직리) 고려의 문신이자 문장가인 백운거사(白雲居士) 이규보(1168∼1241)선생의 묘소이다. 고려의 무신정권 하에서 태어나 무신정권에 적극 협력했던 문인의 한 사람으로, 명종 19년(1191)에 진사시에 합격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문하시랑 평장사에 올랐다. 시문에 능하였던 선생은 중국의 모방이 많았던 당시에 고구려의 시조 동명성왕 이야기를 서사시로 엮는 등 민족정신에 바탕을 두고 글을 썼다. 또한 몽고군의 침입으로 강화도로 천도해서 대장경을 만들 때 민족수호의 충정이 담긴 『대장경각판군신기고문(大藏經刻板君臣祈告文)』을 지었다. ..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_강화 능내리 석실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8호 _ 강화 능내리 석실분 (江華 陵內理 石室墳) 수량/면적 : 1기 / 2,340.9㎡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양도면 능내리 16-1번지 강화 능내리 석실분은 고려시대의 왕릉급 무덤이다. 무덤 앞 양편에는 망주석으로 추정되는 사각 석주가 남아 있으며, 사각 석주의 3면에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양각되어 있다. 고려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진 이 고분은 과거 도굴로 인하여 석실이 노출되어 있어 보존·정비의 필요성이 꾸준히 제기됨에 따라 이를 위한 발굴을 2006년 말에서 2007년 초에 이르기까지 실시하게 되었다. 석실 내부는 화강암을 잘 다듬어 축조되었으며, 봉분구조물과 석실, 건물지가 양호하게 남아 있어 고려시대 지배계급 묘제의 전형을 보여..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_허유전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6호 _ 허유전 묘 (許有全 墓) 수량/면적 : 1기 / 557.9㎡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불은면 두운리 산297번지 고려 후기 충숙왕 때의 문신인 충목공 허유전(1243∼1323) 선생의 묘소이다. 허유전은 1243년(고종 30년) 출생했으며, 고려 원종 때 문과에 급제하였고 1309년(충렬왕 34) 전라도안찰사를 거쳐, 밀직사사에 올라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여러 인물을 선발하는 일을 맡았다. 충숙왕 초에는 가락군에 봉해지고 충숙왕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를 거쳐 정승에 올랐다. 묘는 도굴된 상태로 방치되었다가 1985년 후손 허관구(許官九)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1988년 6월 묘지 발굴 당시 고려청자 잔 여러 조각, 고려 토기조각 수십..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_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25호 _ 갑곶나루 선착장 석축로 (甲串나루 船着場 石築路) 수량/면적 : 2개소/1,253㎡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강화읍 갑곶리,김포군 월곶면 성동리 일원 강화읍 갑곶리와 김포군 월곶면을 배로 연결해 주던 곳이다. 갑곶이란 지명은 고려 고종 때 몽고가 침입하자 왕이 강화도로 천도하게 되었을 때 이곳이 강 건너와의 거리도 짧고 수심이 얕아서 군사들이 갑옷을 벗어 쌓아 놓고 건널 수 있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 이곳은 정묘호란(1627) 당시 인조가 건넜던 나루터로, 병자호란(1636) 때에도 봉림대군이 임금을 모셨던 곳이고, 병인양요(1866) 때에는 프랑스군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처음에는 나루터 시설 없이 이용되었다가, 조선 세종 원년(..

최초의 해군사관학교 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_강화 통제영학당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9호 _ 강화 통제영학당지 (江華 統制營學堂址) 면 적 : 6,381㎡ 지정일 : 2001.04.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갑곳리 1061 시 대 : 1893년 통제영 학당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군사관학교로 여겨진다. 조선수사해방학당, 총제영학당으로도 불렸다. 병인양요·신미양요·강화도조약을 겪은 조선정부는 해군 지휘관 양성을 목표로 통제영학당을 세웠다. 1893년 2월 기존의 수군편제를 해군편제로 개편하면서 그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고자 같은 해 3월 해군사관 및 하사관 양성학교인 통제영학당 설치령을 공표하고 갑곶진 인근에 교사를 신축하여 1893년 10월에 사관생도 50명, 수병 300명을 모집하면서 개교하였다. 개교와 함께 W.H.Callwell 등 영국장교들이 교관..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5호_황형 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65호 _ 황형 묘 (黃衡 墓) 면 적 : 2,629㎡ 지정일 : 2013.07.29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곳리 산 72-1 황형(1459∼1520)은 조선 성종, 중종 때의 무신으로서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창원(昌原)이다. 1480년(성종 11) 무과 및 진현시에 급제하고 1486년(성종 17)에는 무과 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라좌도방어사, 경상도 병마절도사, 도총관, 지훈련원사, 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중종 때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가 1510년(중종 5) 삼포왜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제포(薺浦)에서 왜적을 크게 무찌르고 그 공을 인정받아 경상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 그 뒤 평안도·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렀다. 시호는 장무(莊武)이..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_강화 대산리 지석묘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1호 _ 강화 대산리 지석묘 (江華 大山里 支石墓) 수량/면적 : 1기 / 558㎡ 지정일 : 1995.03.02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대산리 1189-1 시 대 : 청동시대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력을 가진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4개의 받침돌을 세워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덮개돌을 올려 놓은 탁자식과, 땅 속에 돌방을 만들고 작은 받침돌을 세운 뒤 그 위에 덮개돌을 올린 바둑판식으로 구분된다. 강화 고려산 동쪽 봉우리인 북산의 해발 약 20m 능선에 있는 이 고인돌은 탁자식이다. 약간의 흙과 자갈로 지면을 높이고 그 위에 받침돌을 세운 뒤 덮개돌을 올렸으..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6호_고천리 고인돌군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46호 _ 고천리 고인돌군 (古川里 고인돌群) 수량/면적 : 18기 / 462,646㎡ 지정일 : 1999.04.26 소재지 : 인천 강화군 내가면 고천리 산115번지 일원 시 대 : 청동시대 고려산(해발 436m)의 서쪽 능선을 따라 해발 350∼250m 지점에 18기의 고인돌무덤이 흩어져 있다. 우리나라 고인돌무덤이 분포하는 평균 고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고인돌 무덤들은 무너져 원형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그 중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는 북방식 고인돌무덤은 덮개돌의 크기가 가로 3.35m, 세로 2.47m, 두께 0.65m이다.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암석에는 고인돌무덤을 만들기 위하여 돌을 떼낸 흔적이 남아 있다 고천리 고인돌군 표지판 고천리 고인돌군 고천..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_양헌수 승전비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_ 양헌수 승전비 (梁憲洙 勝戰碑) 인천광역시 기념물 제36호 _ 양헌수 승전비 (梁憲洙 勝戰碑) 수량/면적 : 1기(45㎡) 지정일 : 1995.11.15 소재지 : 인천 강화군 길상면 온수리 산42번지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군을 물리쳐 승리를 한 양헌수(1816∼1888) 장군의 공적을 기리고 있는 비이다. 프랑스는 조선 고종 3년(1866) 10월 천주교 탄압을 구실 삼아 극동함대 소속 군함 7척으로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는데 당시 순무천총 양헌수 장군이 정족산성에 포수 500여 명을 매복 시켰다가 밤에 기습 공격하여 물리쳤다. 양헌수 장군은 헌종 4년(1838)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고, 병인양요 때 공을 세워 한성부 좌윤으로 특진되었으며 부총관·금위·어영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