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재자료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_김취려 묘

기리여원 2022. 1. 26. 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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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 제25호 _ 김취려 묘 (金就礪 墓) 

수량/면적 : 1기(11,107㎡)
지정일 : 2010.12.06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산 71

 

고려 후기의 장군 김취려의 묘이다.

 

그는 고려 후기 예부시랑을 지낸 김부(金富)의 아들로 본관은 언양이며, 음서(蔭敍)를 통해서 정위(正尉)에 임명되었다. 1216년 거란군이 청천강 북쪽을 약탈하자 장군은 앞장서서 싸웠다. 1217년 5월 거란군이 한강 이남을 공격하자 박달재에서 크게 무찔렀다. 1218년 7월에도 거란군의 침략을 막았고, 이듬해 2월에는 마침내 강동성(江東城)을 함락하고, 거란군을 완전히 무찔렀다. 1232년에는 벼슬이 최고관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까지 올랐으며, 위열공(威烈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사람됨이 정직하고 검소하였으며, 아랫사람을 바르게 다스려 누구도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고종 21년(1234) 강화에서 사망하였다.

김취려 묘지석에는 ‘공은 갑오년(고종 21, 1234) 2월 14일에 미미한 병세를 보이다가 21일에 갑자기 돌아가시니 향년 63세이다. 천자(天子)께서는 몹시 슬퍼하며 조문하고 부의를 내리셨다. 공은 복야(僕射) 조언통(趙彦通)의 따님을 부인으로 맞아들여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두시고 뒷일을 처리하게 하였다. 7월 12일에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묘지석이 발견된 곳에 강화군과 언양김씨 종친회에서 묘소를 새롭게 정비하였다.


묘역에는 원형의 봉분 앞에 망주석 한 쌍과 상석이 갖추어져 있으며, 하단 부분에 묘역을 정비하고 종친회에서 건립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김취려 묘 표지판

 

 

김취려 묘 입구 안내간판

 

이 곳에서 김취려 묘까지는 비포장도로입니다.

 

언양김공취려장군묘소입구 (彦陽金公就礪將軍墓所入口) 안내 표지석

 

 

이 곳에서 김취려 묘가 보입니다.

 

 

김취려 묘

 

 

김취려 묘

 

 

김취려 묘에서 본 사적비

 

 

1983.05.12일에 건립된 사적비

 

 

김취려 묘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 1172~ 1234)

 

김취려(金就礪, 1172~ 1234)는 고려 후기의 무신, 장군이다.

 

본관은 언양이며, 금오위대장군(金吾衛大將軍) 김부(金富)의 아들이다. 충렬왕과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의 증조부이다.

 

고려 고종 때 몽고군에 쫓겨 서북면을 침략한 거란족을 격퇴한 공으로 수태부(守太傅) 개부의동삼사 문하시랑평장사(開府儀同三司 文下侍郞平章事) 상장군(上將軍)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되고, 이후 수태사(守太師) 특진주국(特進柱國)에 올랐다. 고려 고종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위열(威烈)이다.

 

김취려 묘

 

이곳에서 출토된 묘지명을 통해 '7월 12일에 진강현(鎭江顯)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는 기록이 확인되었다. 묘지명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취려 묘

 

 

김취려 묘

 

 

2020.03.15일 언양김씨 대종회에서 새로 설치한 혼유석, 상석, 향로석

 

 

김취려 묘에서 바라본 집입로 전경

 

2022.01.23.일요일, 강화군 양도면 하일리, 김취려 묘

글 문화재청,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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