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재자료 518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_오천향교 대성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7호 _ 오천향교 대성전 (鰲川鄕校 大成殿)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향교길 45-26 (오천면) 시 대 : 조선 ◦ 이곳 오천은 조선시대 충청도수군절도사영이 설치된 곳이었으나 1895년 폐영되었다가 1901년에 오천군이 신설된 곳임. ◦ 오천군 신설과 동시에 이곳 유림들은 고을에 향교를 갖추려 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간단한 제향을 할 정도의 기물과 시설을 갖춘 재 향교의 터전을 잡았음. ◦ 그 후 1905년에 이르러 토지 기증․헌납 등을 통한 유림들의 노력과, 군수의 조력으로 대성전 건물을 완성하여 향교의 모습을 갖추고 이 고을 유교문풍을 진작하면서 오늘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음. ◦ 그리하여 오천향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짧은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4호_편무성가옥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4호 _ 편무성가옥 (片戊成家屋) 수 량 : 1동 지정일 : 1988.08.30 소재지 : 충남 보령시 천북면 삼산농현길 80 (신죽리) ◦ 조선후기 팔작지붕으로 된 ㅡ자형의 고택으로, 왼쪽에 부엌을 설치하고, 앞에는 마루를 설치하였는데, 마루 앞에는 분합문(分閤門)을 달았으며, 지붕이 기와에는 옹정8년(擁正八年)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1730년에 지어진 건축물로 짐작할 수 있음. 편무성가옥 표지판 편무성가옥 대문채 편무성가옥 대문 대문에서 본 정원 안채앞 마당에서 본 대문채 편무성가옥 안채 편무성 가옥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건축물이다. 안채 좌측은 부엌을 설치하였고 마루를 놓아 앞에는 대청 양쪽 전체에 드리는 긴 창살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달았다. 편무성..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_광성부원군 사우, 김극성의 신도비와 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3호 _ 광성부원군 사우 (光城府院君 祠宇)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송덕신송길 457-24 (청소면) 시 대 : 조선시대 소유자(소유단체) : 광산김씨종종 ◦ 보령출신의 조선전기 문신인 김극성(金克成, 1474~1540)의 위패를 봉안한 사당으로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처음에는 청라면 장산리에 세웠던 것을 청천저수지의 조성으로 수몰지구가 되자 1960년 후손들이 그의 묘소가 있는 이곳에 옮겼음. ◦ 보령지역에는 김극성의 후손인 광산 김씨들이 유력 성씨를 이루며 오랫동안 세거해 오고 있음. ◦ 사우는 목조 기와집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출입문은 하나이고 토석 혼축으로 담장을 만들었음. ◦ 김극성은 일찍이 사마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0호_공주 이유태유허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90호 _ 공주이유태유허지 (公州李惟泰遺虛地) 수량/면적 : 4588 지정일 : 2004.10.30 소재지 : 충청남도 공주시 중등골길 54-7 (상왕동, 외 9필지) 조선중기에 송준길, 송시열, 윤선거, 유계와 함께 소위 충청도 산림오현(山林五賢)으로 손꼽혔으며, 호서예학(湖西禮學)의 큰 맥을 이은 巨儒이자 經濟思想家인 초려 이유태 선생이 말년을 보낸 곳으로,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계승·교육하는 전통서원의 면모를 유지하여 오고 있으며 고택과 용문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용문서원의 유래는 이유태선생이 저술하고 제자를 가르쳤던 중동서재와 용문서재에서 비롯되었는데 중동서재는 선생이 거주하던 집이 있던 것이고, 용문서재는 현재 용문서원과 종가가 있는 자리에 있던 것으로 문하생들이 거주하면..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_서산 김적 및 김홍욱묘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0호 _ 서산 김적 및 김홍욱묘역 (瑞山 金積 및 金弘郁墓域) 수 량 : 무덤 2기, 신도비 1기 지정일 : 2010.12.30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대로화곡길 50-13 (대산읍) 김적묘는 언덕 경사면에 자연 석축으로 기단을 마련하고, 장대석으로 구획한 계체석 위쪽에 혼유석, 상석, 향로석이 있음. 향하여 오른쪽에 묘표석이 있으며 그 아래쪽 양쪽에 망주석과 동자석, 문인석이 서 있고 묘표석의 머리는 용조각과 구름무늬가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아들 홍욱이 주관하여 세웠으며 포저 조익이 찬하였음. 문인석은 화려한 금관조복형으로, 조각솜씨가 뚜렷하며 석물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음. 김홍욱묘는 자연석축을 쌓아 묘역을 만들고, 위에서부터 날개가 달린 봉분 앞에 상석, 그 아래로 문..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_충청수영 장교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1호 _ 충청수영 장교청 (忠淸水營 將校廳) 수 량 : 1동 지정일 : 2010.12.30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02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 장교청(객사), 내삼문만 남아있음. ◦ 장교청은 1833(순조 33년)에 만들어져 수영의 군간부들이 회의를 하던 장소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평면에 오른쪽 끝 한칸에는 온돌방을 두었고 나머지 세 칸은 넓은 대청으로 마루를 깔았으며, 큰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임 충청수영 장교청 표지 충청수영 장교청 전경 충청수영 장교청 전경 충청수영 장교청 전경 충청수영 장교청 .충청수영 장교청으로 전해져 오기도 하지만 객사로 추정되기도 한다. 객사는 수군절도사가 왕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3호_충청수영 진휼청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413호 _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賑恤廳) 수 량 : 1동 지정일 : 2010.12.30 소재지 :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658 ◦ 조선시대 충청수영성 안에는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는 진휼청으로 추정되는 이곳을 비롯해서 장교청과 삼문만이 남아있으며,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곳이었음. ◦ 충청수영이 폐지된 이후 민가로 쓰이다가 1994년 토지와 건물을 매입하여 보존하고 있는데,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대청․온돌방․툇마루, 부엌 등이 있으며, 충청수영 고지도등에 나타난 건물 배치로 볼 때 진휼청으로 추정하고 있음 충청수영 진휼청 표지판 충청수영 진휼청 (忠淸水營 賑恤廳) 진휼청은 흉년에 충청수영 관내의 빈민 구제를 담당하던 ..

독립운동가 김복한 묘, 추양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69호 _ 김복한 묘 (金福漢 墓) 수 량 : 1기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홍성군 서부면 이호리 산70-4 시 대 : 1924년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지산(志山) 김복한(1860∼1924)의 묘소이다.1892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교리가 되었고 이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1894년 승정원 승지에 올랐으나 6월 갑오개혁으로 일본의 간섭이 시작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갔다. 8월에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이에 이설·이근주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홍주목사 이승우에게 체포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석방된 후 세상과 인연을 끊고 후진 양성에 전념하여 문하생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역신들을 참수하..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8호_고창향교 대성전, 고창향교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98호 _ 고창향교 대성전 (高敞鄕校 大成殿) 수량/면적 : 일원 지정일 : 1985.08.01 소재지 : 전북 고창군 고창읍 향교길 27-3 (교촌리) 시 대 : 1512년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들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고창향교는 고려 공민왕(재위 1351∼1374) 때 월곡리에 있던 학당사을 옮겨온 것으로, 조선 중종 7년(1512)에 다시 지었다. 대성전은 선조 38년(1605)에 수리하였고, 1974년에 기와를 보수하였다.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안쪽에는 공자를 비롯한 그 제자와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나라에서 토지와 노비·..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25호_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_ 선운사 도솔암 내원궁 (禪雲寺 兜率庵 內院宮) 수 량 : 1棟 지정일 : 1986.09.09 소재지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615번지 시 대 : 6년(1511) 선운사는 도솔암을 비롯한 4곳의 암자를 포함한 사찰이다. 도솔암 안의 내원궁은 험준한 바위 위에 세운 법당으로 상도솔암이라고 부른다. 조선 중종 6년(1511)과 숙종 20년(1694),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었다. 이 건물은 거대한 바위 위에 세웠기 때문에 기단없이 편편한 곳에 자리잡아 원형 주춧돌만 두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사용하였고, 벽선에 亞자형 2짝 여닫이문을 달았는데, 가운데 칸과 양 옆칸은 그 간격을 다르게 하여 예불 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