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문화재자료 503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0호_범어사 영탱(호암 체정 진영)

부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0호 _ 범어사 영탱 (梵魚寺 影幁), 호암 체정 진영 수 량 : 9점 지정일 : 2018.01.31 소재지 : 부산광역시 금정구 범어사로 250 (청룡동, 범어사) 시 대 : 조선 후기 조선후기(19세기~20세기)에 그려진 고승의 진영 9폭이 일괄로 지정되었다. 전체적으로 19세기 진영의 특징인 벽면과 바닥을 분명하게 구분한 상하 2단 구도로 그려졌으며 앉은 자세, 고승이 손에 든 지물, 가사의 문양과 화문석의 문양 등에서는 세부적으로 차이가 난다. ◌ 범어사 금봉당대사(金峯堂大師) 진영은 금봉당 상문대사가 화문석 위의 의자에 향좌측을 향해 가부좌 자세로 앉아있다. 금봉당 대사의 오른쪽 팔 뒤 경탁 위에는『화엄경』, 『법화경』, 『반야경』이라 적힌 경전이 놓여 있다. 복식은 ..

회안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2호_서산 숭덕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52호 _ 서산 숭덕사 (瑞山 崇德祠) 수 량 : 1동 지정일 : 1996.11.30 소재지 : 충남 서산시 부석면 숭덕사1길 49 (강당리) 서산 숭덕사는 조선 태조 넷째 아들인 회안대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회안대군은 조선 전기의 왕자로 이름은 방간이다. 조선왕조가 시작된 태조 1년(1392)에 회안군으로 봉해졌으며 태종 1년(1401)에 회안대군이 되었다. 제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 방원을 도왔으며, 그 이듬해 제2차 왕자의 난이 실패하자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세종 1년(1419) 천명을 누리다가 홍주에서 죽었으며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처음에는 회안대군의 위패를 부인 밀양 황씨의 묘 옆에 모셨으나 선조 40년(1607)에 왕명으로 부석면 강당리에 건물을 지어 모시고 숭..

천년고찰 기도 영험도량, 서산 부석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95호 _ 부석사 (浮石寺)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부석사길 243 (부석면, 부석사)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7년(677)에 의상대사가 지었으며 그 뒤 무학대사가 보수하였다고 전한다. 경내에는 극락전을 비롯하여 같은 건물로 연결된 심검당, 무량수각 등의 건물이 있으며, 극락전 앞에 안양루가 서해를 향하고 있다. 극락전은 앞면 3칸·옆면 3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으로 꾸몄다. 고려시대의 건축 양식을 보이고 있는 건축물이다 부석사 (浮石寺) 표지판 천년고찰 기도 영험도량, 부석사의 유래 아미타부처님을 모신 부석..

최치원선생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9호_부성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9호 _ 부성사 (富城祠)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지곡면 산성내동길 47-17 (산성리)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최치원은 경무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18세 때 급제하였으며 2년간 낙양을 유랑하며 시를 짓는데 몰두하였다. 중국에 머물면서 황소의 난 등을 직접 겪으며 귀국한 뒤 의욕을 가지고 이미 무너져가고 있던 신라 사회에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 중심의 귀족사회에서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분체계의 한계를 느껴 외직을 지원하였다.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지금의 경상남도 함양), 부성군(지금..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_정산 향교

충청남도 기념물 제132호 _ 정산향교 (定山鄕校) 면 적 : 7,071㎡ 지정일 : 1997.12.23 소재지 : 충남 청양군 정산면 서정리 516-2번지 향교는 공자와 여러 성현께 제사를 지내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해 나라에서 세운 교육기관이다. 정산향교를 세운 시기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전기부터 있던 것으로 보인다. 배우는 공간으로 강당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를 비롯하여 강학루와 전사청이 있고, 제사 공간으로 위패를 모시고 있는 대성전이 있다. 대성전 안쪽에는 공자와 그의 제자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성현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전적·노비 등을 지급받아 학생을 많이 가르쳤으나, 갑오개혁 이후 교육 기능은 사라지고 봄·가을에 ..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0호_정충신 묘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10호 _ 정충신 묘 (鄭忠信 墓) 수 량 : 1기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대요한우물길 186-3 (지곡면) 조선 중기의 무신인 만운(晩雲) 정충신(1576∼1636) 장군의 묘소이다.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7세에 권율 장군의 휘하에서 종군하였으며, 병조판서 이항복에게 학문을 배워 같은 해 가을에 무과에 합격하였다. 1624년에 일어난 이괄의 난을 평정하여 진무공신 1등으로 금남군에 봉해졌으며,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팔도부원사로 중국 청나라 군대를 철군시켰다. 1630년 평안도에서 일어난 유흥치의 난을 평정한 후 오위도총관, 포도대장 등을 거쳐 경상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다. 천문·지리·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능통하였..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_정충신사당(진충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06호 _ 정충신사당(진충사) (鄭忠信祠堂(振忠祠))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청남도 서산시 진충사길 103 (지곡면, 진충사) 조선 전기 무신인 정충신 장군(1576∼1636)의 영정과 유품을 보관하고 있는 사당이다. 장군은 임진왜란(1592) 때 17세의 나이로 권율 장군을 도와 싸웠으며, 인조 2년(1624)에는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정묘호란 때는 팔도부원사(八道副元師)로 참전하였다. 그 뒤 포도대장, 병마절도사 등을 지냈다. 이곳은 인조 14년(1636) 왕명으로 세운 이후 영조 13년(1737) 고쳐 지었다. 정조 24년(1800)에는 당시 곡성 현감으로 있던 그의 5대 손인 정세환과 9대 손인 정재칠이 각각 정미면 신시리와 현 13세손 ..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67호_담양 호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67호 _ 담양 호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潭陽 護國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 수 량 : 1구 지정일 : 2008.04.11 소재지 : 전라남도 담양군 완동길 24-43 (담양읍, 호국사) 담양 호국사에 소장된 조선후기의 목조 아미타 여래좌상이다. 2005년 2월 확인된 복장물의 발원문(28.5cm×131cm)을 통하여 1660년 5월 15일 담양 용구산 회적암에서 아미타불 1구를 조성하여 봉안(順治十七年庚子五月十三日造成彌陀一軀畢功安于龍龜山晦迹庵)했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의 형식은 촘촘하게 밀집된 나발에 상단 계주와 하단계주가 선명하며, 얼굴은 사각형이지만 턱 부분이 약간 좁으며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돌출해 있고 예리하게 뻗은 가는 눈썹과 정면 아래쪽을 향하고 있는 일자형의 눈, 뭉뚝..

최익현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_모덕사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52호 _ 모덕사 (慕德祠) 수 량 : 1동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남 청양군 목면 나분동길 12 (송암리) 조선 후기 애국지사인 최익현(1833∼1906)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최익현은 이학로의 제자로 문학과 도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철종 6년(1855)에 문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현감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나라를 걱정하며 대원군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문을 여러 차례 올리고 흑산도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또한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을사 5적을 처단할 것을 주장하였고 같은 해 일본의 죄상을 16개 항목에 적어 항쟁하며 전라북도 태인에서 의병을 모집, 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대마도에 유배되었고 적군이 주는 음..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_계봉사 오층석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47호 _ 계봉사 오층석탑 (鷄鳳寺 五層石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84.05.17 소재지 : 충남 청양군 목면 본의리 675번지 시 대 : 고려시대 계봉사의 정원 가운데 서 있는 5층 석탑이다. 계봉사는 백제 성왕 때 지었다고도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 때 지어졌다고 하나 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조선 헌종 때 불에 타 버린 것을, 옛이름을 따서 작은 규모로 새로이 짓고 정원을 꾸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5층 석탑과 물을 받는 돌구유만이 옛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탑은 2층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위층 기단의 앞면에는 탑의 이름을 새기고, 탑신의 각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떠 새겼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1층부터 4층까지 4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