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형문화재/경기도 104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0호_박동량 호성공신교서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0호 _ 박동량 호성공신교서 (朴東亮 扈聖功臣敎書) 수 량 : 1권 지정일 : 2011.303.08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시 대 : 조선시대 1604년 문신 박동량을 호성공신 2등에 책록한 교서. 공신교서. 선조는 1604년(선조 37) 6월에 임진왜란 때 공헌이 있는 신하에게 호성공신(扈聖功臣)·선무공신·청난공신 등 세 종류의 공신을 녹훈하고, 같은 해 10월에 이르러 공신으로 녹훈된 이들에게 교서를 발급하였다. 이 중 호성공신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피난 갈 때 임금과 세자를 호종한 신하에게 내린 칭호이며, 이들에게 공훈에 따라 등급한 사실을 문건으로 내린 것이 교서이다. 호성공신은 1등에 이항복(李恒福) 등 2인, 2등에..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9호_만력기축 사마박몽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9호 _ 만력기축 사마방목 (萬曆己丑 司馬榜目) 수 량 : 1책 지정일 : 2011.03.08 소재지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운중동, 한국학중앙연구원) 시 대 : 조선시대 사마방목은 조선시대 과거시험에 합격한 생원과 진사의 명부로, 문과 방목과 동일한 형식으로 편찬되었다. 만력 기축년에 실시된 과거시험은 조선 건국 이후 태조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명나라 측의 오류를 바로잡은 이른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문제가 1588년(선조 21)에 이르러 원만히 해결되자,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 이듬해 시행되었다. 이때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한 호성공신 박동량에게 반사한 방목이다. 이 방목은 박동량에게 반사한 원본이 망실되어 후대에 다시 정서(淨書)하여 만든 전사본 1..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_이향로선생 생가, 화서기념관, 벽계사당, 노산사지, 이향로 묘소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05호 _ 이항로선생 생가 (李恒老先生 生家) 수량/면적 : 2동 59㎡ 지정일 : 1980.06.02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서종면 화서1로 239(노문리) 조선 말기 성리학자였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1792~1868)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이 집이 위치해 있는 벽계마을은 벽진 이씨의 동성촌으로 이항로선생 생가 외에도 노산사(蘆山祠)가 있어 선생의 높은 학식과 유학을 전승하고 있다. 이항로의 고조 대에 벽계마을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으며, 이항로의 부친이 생가의 안채를 약 200여 년 전에 건립한 것으로 전한다. 현재 가옥의 배치는 ‘ㄱ’자형의 안채와 ㄷ자형의 사랑채가 가운데 담을 두고 가로로 긴 ‘ㅁ’자형을 취하고 있다. 사랑채는 1994년에 새로 건립한 것이며, ..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_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71호 _ 양평 상자포리 마애여래입상 (楊平 上紫浦里 磨崖如來立像) 수 량 : 1좌 지정일 : 2000.03.24 소재지 : 경기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36-1번지 시 대 : 고려시대 파사성 서쪽 능선의 남쪽 경사면의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다. 왼쪽 눈과 콧망울 아래쪽, 입술 등 군데군데 표면이 떨어져나간 곳이 있다. 머리 오른쪽이나 왼쪽 어깨에는 잘못된 선을 수정한 곳이 보여 기량이 떨어지는 지방 장인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두광(頭光 ; 붓다의 정수리에서 나오는 성스러운 빛을 형상화한 것)은 이중의 동심원으로 지나치게 크고, 대좌(臺座 ; 불교존상을 봉안하여 올려 놓는 받침대)는 내부를 거의 직선으로 표현하여 연꽃잎으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두 발은 법의 속에 감춰져 드러나..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_사나사 원종국사석종비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3호 _ 사나사 원증국사 석종비 (舍那寺 圓證國師 石鐘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8.10.10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번지 시 대 : 고려 우왕 12년(1386) 양평 사나사는 용문산 자락에 있는 사찰이다. 고려 초기 크게 활약했던 대경(大鏡) 대사가 제자였던 융천(融闡) 등과 함께 창건한 것으로 전한다. 사나사는 보우가 중창하였는데, 조선 시대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거치면서 소실되었다가 다시 중건되었다. 사나사 경내의 동편에 있는 비각 안에 원증국사 석종비가 있고, 나란히 석종이 건립되어 있다. 석종비는 규모가 작은 편으로 비좌-비신-개석을 결구하여 세웠다. 비좌는 상면이 고른 자연석을 활용한 것으로 보이며, 그 위에 올린 비신은 좌우에 별도의 보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_사나사 원증국사탑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2호 _ 사나사 원증국사탑 (舍那寺 圓證國師塔) 수 량 : 1기 지정일 : 1978.10.10 소재지 : 경기 양평군 옥천면 용천리 304번지 시 대 : 고려시대 우왕 9년(1383년) ‘사나사 원증 국사 탑’은 태고화상 보우(太古和尙普愚, 1330~1382)의 사리탑이다. 보우의 본관은 홍주(洪州), 속성은 홍씨(洪氏), 첫 법명은 보허(普虛), 호는 태고(太古)로 홍주(현재 홍성) 출신이다. 보우는 13세에 출가해 회암사 광지(廣智)의 제자가 되었고, 가지산(迦智山)에서 수행했다. 공민왕 5년(1356) 왕의 청으로 봉은사에서 설법하였고, 같은 해 4월 왕사로 책봉되어 광명사에 머물렀다. 1371년 공민왕은 스님을 국사로 봉한 뒤 영원사(營原寺)에 머물기를 청하였으나 사양하였다...

경기도 유형문화제 40호_대동법 시행기념비, 송하한유도, 김육 초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0호 _ 대동법 시행기념비 (大同法 施行記念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3.07.10 소재지 : 경기 평택시 소사동 140-1번지 대동법(大同法)의 실시를 알리기 위해 세운 비이다. 대동법은 각 지방의 특산물을 공물(貢物)로 바쳐야 했던 이전의 폐단을 없애고, 쌀로써 대신 바치도록 한 조세제도이다. 조선 선조 41년(1608)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되었고, 효종 2년(1651) 충청감사로 있던 김육이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상소를 하여 왕의 허락을 얻어 실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동안 어려움에 처했던 백성들의 수고가 덜어지는 등 좋은 성과를 이루게 되자, 왕은 이를 기념하고 만인에게 널리 알리도록 하였다.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맨위에 머릿돌까지 갖춘 모..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_연행일록부연행별장외명현간찰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34호 _ 연행일록부연행별장외명현간찰 (燕行日錄附燕行別章外名賢簡札) 분 류 : 기록유산 / 전적류 / 필사본 / 고본 수 량 : 3책 56장 지정일 : 1988.12.02 소재지 : 경기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산19 경기도 박물관 조선 후기의 문신인 조영복(1672∼1728)이 북경을 다녀올 때 쓴 친필일기와 동료 대신들과 주고 받은 송별시 및 편지 등을 모아 만든 것이다. 조영복은 1714년 예천군수로 있으면서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헌납 등의 벼슬을 지내고 동래부사를 거쳐 도승지를 지냈다.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한성부우윤이 되었고 난이 평정된 뒷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서예에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연행일록』은 숙종 45년(1719) 11월부터 숙종 46년(1720) 3월까지 북..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8호_백자청화 ‘성화3년’ 명 황수신 묘지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58호 _ 백자청화 ‘성화3년’ 명 황수신 묘지 (白磁靑畵 ‘成化3年’銘 黃守身 墓誌) 수 량 : 1건 4점 지정일 : 2019.08.23 소재지 : 경기도 황수신(黃守身, 1407~1467)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좌찬성, 우의정, 영의정 등을 두루 지냈으며,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널리 알려진 황희(黃喜)의 아들이다. 2012년 황수신 묘역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백자청화묘지석이 출토되었다. 묘지석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 무덤의 위치와 좌향(坐向) 등을 적어 무덤에 묻는데, 돌이나 도자기로 된 지석을 많이 사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주로 백자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사각 도판에 음각 또는 청화, 철화로 글을 썼다. 특히 청화백자 지석은 왕실의 친인척과 정3품 이상 당상관이 사용할 수 있었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318호_박충원 백자청화묘지

경기도 유형문화재 _ 박충원 백자청화묘지 (朴忠元 白磁靑畵墓誌) 수 량 : 8점 지정일 : 2018.04.30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시 대 : 조선전기 백자청자 묘지석 조선 전기 문신이자 학자인 박충원(朴忠元, 1507~1581)의 백자묘지석이다. 묘지석에는 죽은 사람의 행적과 가족관계, 무덤의 위치 등을 기록하여 무덤 주변에 묻는데, 이러한 방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돌로 만든 것도 있지만 주로는 사각 도판에 음각 또는 청화, 철화로 글을 쓴 백자지석이 많이 사용되었다. 특히 청화백자 지석은 왕실의 친인척과 정3품 이상 당상관이 사용할 수 있었다. 박충원의 청화백자묘지석은 모두 8장으로 당시 우의정이던 김귀영(金貴榮)이 글을 썼다. 묘지석은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