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향토유적 44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1호_천황사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상 및 대좌 · 수미단

진안군 향토문화유산 제21호 _ 천황사 대웅전 석가여래삼존불상 및 대좌 · 수미단 지정일 : 2016.12.28 소재지 : 전북 진안군 정천면 갈용리 1428 시 대 : 1680년 천황사는 875년(신라 헌강왕 1) 무염(無染)선사가 세우고, 1604년(고려 문종 18)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중창한 사찰이다. 원래 주천면 운봉리에 있었으나 조선 숙종 때 중건하면서 현재 자리로 옮겼다고 한다. 천황사 대웅전에 모셔진 석가여래삼존불상은 중앙 본존불인 석가모니불, 좌우 협시불인 아미타불과 약사불로 구성된 목조 삼세불상이다.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서 촉지인(觸地印)을 했으며,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종지를 맞대어 무릎 가까이 두었다. 아미타불과 약사불도 엄지와 중지를 맞댄 손 모양을 하..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5호_경안군 및 임창군 묘

고향시 향토문화재 제5호 _ 경안군 및 임창군 묘(慶安軍 및 臨昌君 墓)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대자동 경안군 이회(慶安君 李檜)는 조선조 인조(仁祖)의 손자이며 바로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셋째아들이다. 묘는 분겅군부인 허씨(盆城郡夫人 許氏)와 합장되어 있으며, 묘 둘레는 170cm로 뒷면은 중축(重築)된 붉은 벽돌 곡장(曲墻)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 앞 우측에는 묘비, 중앙에는 상석 · 향로석, 그 좌우에는 망주석 · 석인 · 문인석을 배치해 놓았다. 묘비는 숙종(肅宗) 30년(1704) 3월 아들 임창군(臨昌君)이 건립한 것으로 이수와 장방형 비좌를 갖추었고, 총 높이는 196cm, 폭 60cm, 두께 26cm의 규모이다. 임창군 이혼(臨昌君 李焜)의 자는 선경이며, 인조의 증손(曾孫), 경..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21호_열녀 언양김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제21호 _ 열녀 언양김씨 정려(烈女 彦陽金氏 旌閭) 지정일 : 2014.09.30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동면 송용리 산45-1 열녀 언양김씨 정려(烈女 彦陽金氏 旌閭)는 조선시대 열녀 언양김씨의 열행(烈行)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銘旌)을 현판(懸板)으로 걸어놓은 정문(旌門)이다. 언양김씨는 김정(金淀)의 딸로 16세에 장응헌(張應軒)과 혼인하였다. 평소에도 시아버지와 남편을 정성으로 섬기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발발하여 청나라 군사들이 마을로 쳐들어오자 남편에게 시아버지와 자식들을 데리고 뒷문으로 피하게 한 뒤 자신은 앞문으로 나와 적들을 유인하였다. 청나라 군사들을 피해 달아나다 여의치 않자 현재 연동면 예양리 북..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20호_열녀 전주이씨 정려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20호 _ 열녀 전주이씨 정려(烈女 全州李氏 旌閭) 지정일 : 2014.09.30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조치원읍 봉산리 산54-8 열녀 전주이씨 정려(烈女 全州李氏 旌閭)는 조선시대 열녀 전주이씨(1759~1779)의 열행(烈行)을 세상에 널리 알려 칭찬하고 기억하기 위해 나라에서 하사한 명정(銘旌)을 현판(懸板)으로 걸어놓은 정문(旌門)이다. 전주이씨는 1759년(영조 35) 공주(公州)에서 태어났으며, 11세 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3년간 무덤을 보살필 만큼 효심이 뛰어났다고 한다. 1777년(정조 1) 19세에 강화최씨(江華崔氏)인 최지철(1759~1778)과 혼인을 하였으나 남편이 1년 만에 병으로 죽고 만다. 그러자 남편을 따라 죽을 각오로 7일간 식음을 전폐하던 중..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_월산대군 묘 및 신도비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1호 _ 월산대군(月山大君) 묘 및 신도비 수 량 : 일곽 지정일 : 1986.06.16 조새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신원동 427 신원동 능골에 자리잡고 있으며 뒤에 부인 순천 박씨의 봉분을 두었다. 월산대군의 큼직한 봉분 앞에는 묘비와 상석, 문인석, 망주석, 장명등과 신도비 등의 석조물이 배치되어 조선 시대 묘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상석 뒷편의 묘비는 운문이 조각된 비두와 장방형의 대석을 갖추었고, 규모는 높이 180cm, 폭 74cm, 두께 32cm이다. 상석은 3매의 장판석을 놓았는데 정면 270cm, 측면 155cm의 규모이다. 성종 20(1489)년에 왕명에 의해 세워진 신도비는 90cm의 이수와 장방형의 비좌를 갖추었는데 ‘월산 大君碑銘’이란 전자가 새..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7호_대곡리 성황당 장승제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7호_대곡리 성황당 장승제 지정일 : 2014.09.30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217 시 대 : 조선시대 대곡리 장승제(大谷里 長丞祭)는 세종특별자치시 소정면 대곡리 마을의 주민들이 매 윤년(閏年) 음력 1월 14일에 장승을 새로 만들어 세운 후에 마을의 풍요와 안녕, 화합을 바라면서 지내는 제사(祭祀)이다. 장승제의 기원은 밀양박씨(密陽朴氏) 집안의 박승조가 낙향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박승조의 형 박승종(朴承宗, 1562~1623)은 손녀가 광해군(光海君, 1575~1641)의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면서 1619년(광해군 11)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는 등 권세를 누리던 집안이었다. 하지만 인조반정(仁祖反正, 1623)이 일어나 가세가 기울자 박승조는..

임난수장군의 제사를 모시는 사당,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2호_임씨가묘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42호_임씨가묘(林氏家廟) 지정일 : 2003.02.14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나성동 59-1 임씨가묘는 고려 말 무신이었던 임난수(林蘭秀, 1342~1407)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임난수는 고려 말 최영(崔瑩, 1316~1388)장군과 함께 1374년 탐라(耽羅)에서 일어난 목호의 난(牧胡-亂)을 평정한 장군으로 고려가 멸망하자 충청남도 공주목 삼기촌(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세종리)에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벼슬을 주며 회유하는 조선의 태조 이성계(太祖 李成桂, 1335~1408)의 청을 수차례 거절하며 고려에 대한 충절을 지켰다고 한다. 당시 임난수가 심은 나무가 ‘연기 세종리 은행나무(기념물 제8호)’이며, 그의 둘째 아들 임목(林穆, 1371~1448)..

고양시 향토유적 제34호_한미산 흥국사 나한전

고양시 향토유적 제34호 _ 한미산 흥국사 나한전(漢美山 興國寺 羅漢殿) 수 량 : 1동 지정일 : 1999.02.01 소재지 : 고양시 덕양구 지축동 203호 시 대 ; 조선시대 흥국사 본전인 약사전에서 보아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는 나한전은 약사전에 비하여 규모가 약간 작은 조선 후기의 건축물이다. 나한전은 잘 다듬어진 화강석의 기단 위에 4개의 배수구가 있는 직사각형의 초석을 두르고 있으며, 정면 가운데 계단을 두었다. 나한전은 광서 4년(1878)에 지어진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기둥은 배흘림이 거의 없으며 머리에는 평방과 창방을 돌리고 그 위에 여러개의 공포를 짜 맞춘 맞배지붕 건물로 19세기 후반의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문은 매우 섬세하고 화려한 무늬의 문살로 장식되었으며..

고양시 향토문화재 제62호_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고향시 향토문화재 제62호 _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漢美山 興國寺 萬日會碑) 지정일 : 2014.06.09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흥국사길 82(지축동, 흥국사) 일제강점기 의병운동이 활발했던 흥국사에 있는 비석으로 당시 만일동안 법회를 여는 만일회의 역사를 기록한 비문이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표지판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기 표지판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1904~1929년까지 국가의 독립과 왕실의 평안, 불교중흥을 기원하는 '만일염불회'를 열었다. 흥국사의 창건과 연혁, 보수 등의 내용을 기록한 기념비이다.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한미산 흥국사 만일회비 2022.03.13. 고양시 흥국사 '청허(淸虛)'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임난수장군을 제향하는 사당,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35호_숭모각

세종특별자치시 향토유적 제35호 _ 숭모각(崇慕閣) 소재지 : 세종특별자치시 연기면 세종리 88-4 시 대 : 1957년 건립 고려 말의 충신 임난수(林蘭秀, 1342~1407)장군을 제향하는 사당이다. 임난수는 부안임씨로 1342년에 출생하여 고위 관직을 두루 거쳐, 고려 말 최영 장군과 함께 탐라(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되자 두 임금을 모시지 않겠다고 하여 관직을 버리고 충청도 공주목 삼기촌 금강변으로 내려와 여생을 보냈다. 이때 심은 은행나무 두 그루는 600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 무성하게 자라고 있어 세종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그가 고려 왕조를 향하여 절을 했던 전월산 부왕봉과 상려암도 유적으로 남아 있다. 사당에는 임난수 장군의 그림이 걸려 있었는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