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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의 <미법산수도>

_ 표암(豹菴) 강세황(姜世晃, 1713~1791), 조선 18세기 강세황의 본관은 진주, 자는 광지(光之), 호는 표암(豹菴) · 표옹(豹翁)등이다. 그는 조선 후기 문인이자 화가로서 당시의 화단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으로 유명하였다. 이 그림은 중국 북송대의 화가 미불 일가의 산수화 전통을 따른 미법산수화이다. 화면은 상하 2단 구도로 먼 곳에는 작은 산을 가까운 곳에는 구릉과 집을 배치했다. 아래에는 삿갓을 쓰고 도롱이를 걸친 인물이 다리를 건너 마을로 돌아오고 있다. 짧은 횡점이 미점(米點)으로 표현한 산과 나무가 시원하게 느껴진다. 2022.06.03.부산박물관 전시자료 ▼보시고 유익하셨다면 공감(♥) 눌러주세요

세계적인 희귀종, 천연기념물 제147호_괴산 송덕리 미선나무 자생지

천연기념물 제147호 _ 괴산 송덕리 미선나무 자생지 (槐山 松德里 尾扇나무 自生地) 면 적 : 9,917㎡ 지정일 : 1962.12.07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장연면 송덕리 산58번지 미선나무는 우리나라에서만 자라는 희귀한 식물로 개나리와 같은 과에 속하는데, 개나리와 마찬가지로 이른 봄에 꽃이 잎보다 먼저 난다. 높이는 1∼1.5m 정도로 키가 작고, 가지 끝은 개나리와 비슷하게 땅으로 처져 있다. 미선나무는 열매의 모양이 부채를 닮아 꼬리 미(尾), 부채 선(扇)자를 써서 미선나무라 하는데, 하트모양과 비슷하다. 미선나무는 한때 많은 사람들이 함부로 꺾어 가지고 가서 일부 알려진 자생지에서는 완전히 사라진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곳은 미선나무 보존 위원회가 결성되고 서울대학교 관악수목원과 자연보..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_괴산 봉서재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1호 _ 괴산 봉서재 (槐山 鳳棲齋) 수 량 : 1棟 지정일 : 1998.01.09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칠성면 명태재로외사4길 19-1 (외사리) 시 대 : 조선시대 정조2년(1778) 의성 김씨 문중의 재실로 사용하던 곳이며 서당 구실도 하여 백운서당이라고도 한다. 조선 정조 2년(1778)에 처음 세웠고 1915년에 다시 고쳤다. 건물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재실 앞에는 옛 모습을 간직한 대문이 있고 주위는 전통 기법으로 담을 쌓았다. 괴산 봉서재 전경 괴산 봉서재 전경 괴산 봉서재 대문 괴산 봉서재 우측면 정조 2년(1778)에 홍문관 직제학을 지낸 김전(金巓)의 사우(祠宇)로 세워졌으며, 일명 백운서당(白雲書堂)이라고 하여 주변 마을의 학동들을 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0호_괴산 채운암 대웅전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30호 _ 괴산 채운암 대웅전 (槐山 彩雲庵 大雄殿) 수 량 : 1동 지정일 : 2000.05.04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2길 30 (화양리) 시 대 : 조선시대 채운암은 고려 충렬왕 3년(1277) 도일선사가 세운 암자로 조선 광해군 2년(1619) 혜식선사가 고쳐 지으면서 채운암이라 하였다. 효종 4년(1655)에는 혜일선사가 지금의 자리에 욱장사를 지었으나 구한말 왜병의 침입으로 대부분이 불에 타서 없어지고, 1948년 대홍수로 채운암이 파괴되었다. 1949년에 남아 있는 요사채의 일부를 지금 있는 자리에 옮겨 채운암이라 부르고 있다. 채운암 대웅전의 안쪽에는 목조여래좌상(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91호)을 모시고 있다 괴산 채운암 대웅전 표지판 괴산 채운암 대웅전..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_괴산 만동묘정비

충청북도 기념물 제25호 _ 괴산 만동묘정비 (槐山 萬東廟庭碑) 수 량 : 1기 지정일 : 1978.10.27 소재지 : 충북 괴산군 청천면 화양동길 188 (화양리) 묘정비는 사원에 세우는 비로, 사원을 건립하게 된 동기와 모시는 인물을 찬양하는 내용을 기록해 둔다. 이 비는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도와준 중국 명나라의 임금인 신종과 의종의 제사를 지내는 ‘만동묘’라는 사당에 자리잡고 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의 가르침에 따라 그의 제자 수암 권상하가 명나라 의종이 죽은 지 60년이 지난 숙종 30년(1704)에 지은 것이다. 비의 형태는 연꽃무늬를 새긴 바닥돌 위에 네모난 받침돌을 놓고, 그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얹은 모습이다. 비문은 일본인들이 고의로 글자 획들을 쪼아 놓아 알아보기가 힘들..